[책 감상/책 추천] 구구, 서해인, <작업자의 사전>
여성 작가들의 책을 소개하는 뉴스레터 ‘들불 레터’를 운영하는 구구와 대중문화 뉴스 레터 ‘콘텐츠 로그’를 발행하는 서해인이 쓴, 사전형 에세이. 두 저자가 작업자로 일하며 마주친 단어 100여개를 간단하게 정의하는 짧은 글들의 모음인데, 웃길 때도 있고 감동적일 때도 있고 비판적일 때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거절’, ‘공유오피스’, ‘구독’부터 시작해 ‘핏(fit)’, ‘해시태그’, 그리고 ‘후킹’으로 끝나는 일련의 단어들은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따라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참신한 해석이 기대될 것인데, 내가 보기엔 썩 잘했다.
개인적으로 제일 충격적이고 신선했던 정의는 이거다. 구구 작가는 ‘집중력’이란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SNS가 집중력 하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휴대폰 사용을 줄일 것을 권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SNS를 생계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경제적인 자본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 때문에 SNS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인맥을 형성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뢰와 제안에 손쉽게 파묻힐 수 있다.
하지만 물적, 심적 자원 없이 맨땅에서 시작하는 작업자에게는 어쩌면 집중력보다 SNS가 더 중요한 동아줄이 될 수 있다. 시의성 있는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유행과 흐름에 예민해야 한다는 명령과 ‘셀프 브랜딩’이라는, 자본주의가 하달한 위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작업자가 단지 집중력을 위해 이를 거스르는 건 쉽지 않다.
SNS를 생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니까 휴대폰 사용을 줄이라고 권장할 수가 있는 거구나! 와… 이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기나긴 하루의 끝에 내 유일한 낙이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잠시 현실을 부정하는 건데 뜨거운 물로 오래 샤워하면 몸이 건조해지니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피부과 의사들 말에 ‘그럼 이 사람들은 무슨 낙으로 살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비슷한 맥락인 거 같아서 말해 봤다).
‘콘텐츠’에 대한 정의도 나는 크게 공감했다. 구구 작가는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의 원조로 일꾼을 꼽는다. 여러 장소를 떠돌며 일해야 하는 사람(상인, 뱃사공 등)이 먼 곳의 이야기와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기 시작한 게 ‘이야기’의 시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경험을 나누는 것’인데, 벤야민은 현대인이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콘텐츠를 만드는 현대적 일꾼, 즉 작업자들은 이야기꾼일까?
벤야민이 경험의 가치가 떨어진 현대의 ‘이야기(꾼)의 부재’를 언급하며, “10년 뒤 전쟁소설들의 홍수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입에서 귀로 흘러가는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분석한 것처럼, 일부 작업자들이 만드는 이야기들은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앞선 질문에 쉬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일부 작업자는 콘텐츠 제작의 윤리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걸핏하면 ‘아 이 사람 이야기, 영화(혹은 드라마, 웹툰, 소설)로 만들면 진짜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경험을 빼앗아온다. 또, 현실의 고통에는 눈을 감고 그럴듯한 이야기만을 꾸며내며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포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는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이야기는 사라졌고 오직 ‘콘텐츠’라 불리는 껍데기만이 남았다.
개인적으로 숏폼 비디오가 됐든, 기사가 됐든, 웹소설이 됐든,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콘텐츠’라고 표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히 소비되기 위한 것, 예술이나 그걸 만드는 사람이 자부심이나 기쁨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서다. 뭐가 됐든 사람들의 집중력을 잠시 빼앗고 수익만 창출할 수 있다면 OK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쓸 법한 단어 같다. 그런데 구구 작가가 이렇게 말을 해 주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개인적으로 제일 웃겼던 정의는 ‘몰입’에 대한 구구 작가의 정의다.
작업자들은 일단 그 상태에 진입하고 나면 작업이 잘 풀린다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공유하며 오늘도 몰입을 위한 수행에 나선다.
작업자들 사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루 일과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달리고, 글을 쓰고, 수영을 하며 독서와 음악 감상을 마친 뒤 밤 9시에 잠자리에 든다. 자기계발러들에게 잘 알려진 유튜버 ‘돌돌콩’은 하루키의 루틴을 일주일간 실천한 뒤, 그의 루틴이 매 순간 몰입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말해 많은 작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도 했다.
도파민 넘치는 콘텐츠들이 물에 담궈둔 미역처럼 몸집을 불려 우리의 시간을 잡아먹는 현대사회에서 몰입은 성공 보증수표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문가들에 의해 좀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부풀려진다.
몰입의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긍정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본 토대로써 제시한다. 그는 몰입을 통해 경험의 질을 통제해야 삶이 윤택해진다고 말한다. 다만 몰입은 누구나에게나 찾아오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뚜렷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에 의하면 삶의 기쁨은 목적을 계발하고 몰입을 경험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현대 사회의 병폐로 불리는 거의 모든 것에 중독되어 있는 나에게는 난감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이 나와 너무나 먼 이야기 같아서 나는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잠시 딴생각을 했다.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 짤을 떠올리며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도 거꾸로 해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인가 아닌가’ 따위를 말이다.
‘미팅’의 정의에서 서해인 작가는 이렇게 썼다(어쩌다 보니 여태껏 가져온 인용문이 전부 구구 작가의 것이라 공평을 기하기 위해 서해인 작가 분량도 가져온 것이니 안심하시라).
회의실에는 참가자들과의 친밀도를 떠나 정중한 문어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고, ‘굉장히’를 굉장히 많이 쓰는 사람도 있다. “제너럴한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 안의 컨센서스가 필요하고 컴플리트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넥스트 스텝을 기약합시다.”
모든 문장마다 영어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뭘 하자는 건지 뾰족하게 정해진 적은 없었다.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그분을 미국으로 보내드리는 상상을 했다.
‘레퍼런스’에 대한 서해인 작가의 말도 공감됐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는 일을 하는 내가 평소에 심심치 않게 듣는 질문은 일과 상관없이 오로지 즐거움과 쾌감을 위해 보는 콘텐츠가 있느냐는 것인데, 설마 그런 게 없겠느냐고 웃으면서 말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그런 건 없다. 언젠가의 나는 지금 이 대사를 발췌하거나, 지금 이 캐릭터가 내린 선택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고야 말 테다.
사람들은 말한다. 일단 보긴 보는데 본전은 건지고 싶어. 그러나 작품과 나의 관계는 무수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만 알 수 있으며, 그중에는 잭팟도 있고 지뢰도 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나 드라마를 끝까지 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큐레이션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그래서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을 만나는 아리송함을 축적하는 경험은 계속될 운명이다.
(종이책 기준) 한 단어는 대체로 두 쪽 분량이라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각 부(部) 사이에 구구 작가와 해인 작가의 짧은 에세이가 번갈아 가며 들어 있는데 그것도 좋다. 밀리의 서재에서 이용 가능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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