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감상/추천] 골드키위새, <죽어도 좋아>
주인공 이루다는 악덕 상사 백 과장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 시대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회식 자리에서 진상을 부리는 상사를 향해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저주한다. 그 때문일까, 잠시 후 백 과장은 어이 없게 죽는다.
놀란 것도 잠시, 눈을 떠 보니 다음 날이 아니라 백 과장이 죽은 회식 날이다. 어제가 반복되는 것이다.
똑같은 하루를 사는 것도 싫고, 백 과장이 죽는 걸 봐야 하는 건 또 양심에 찔리고, 게다가 은근히 잘되어 가는 사내 썸남과의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이 타임 리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연 이루다는 악몽 같은 하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감상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웹툰을 보고 감상문을 쓰는 건 처음이지만 이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몇 안 되는 웹툰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굳이 유료 결제까지 해서 본 작품이다.
게다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 주는 작품이라 감상문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의 중의적 의미와 기본 설정 자체가 흥미로웠다.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상사가 누구나 한 명쯤은 있을 테니까.
그런 악덕 상사를 몇 번이고 죽여 주는 이 대리 경험은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그러나 이 웹툰의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인격 살해적 막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는 '좋은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고찰했다는 데 있다.
백 과장 본인이 자신이 타인에게 욕을 먹을 짓을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착해져야 타임 리프가 끝나고 소멸된다는 엔딩도 좋았지만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루다가 백 과장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게 정말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백 과장이라는 캐릭터가 겉모습도 준수하고 또 '포메라니안'으로 변신한 모습은 참 귀여워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백 과장이 마음을 바꾸어 먹고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로 루다가 갑자기 강 대리와 헤어지고 백 과장과 이어진다?
극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러면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흐려져 버린다.
백 과장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루다를 사랑하니까 루다도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지구에서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애틋하고 따뜻한 감정이라 해도 그게 언제나 보답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잘 알지 않나.
천국에서는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여기 지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안전 이별'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지금 이 시대에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감정이 통하지 않았을 때 그걸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까지를 말한다.
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칼을 휘둘렀다거나 황산을 뿌렸다는 등, 신체적 피해를 입혔다는 기사를 우리가 종종 보지 않나.
자기 감정이 거절당했을 때, '감히 네(=여자)가? 네까짓 게 나를 거절해?' 하고 욱한 것인데, 이거야말로 여자를 얼마나 무시하는 행위인가.
내(=남자)가 누구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꼭 그걸 받아 줘야 하나?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웹툰을 보면서 백 과장이 착해졌으니 이루다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여성을 마치 착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거나 다름없다.
사실 이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선녀와 나무꾼' 같은 동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꾼은 사슴을 살려 주는 착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선녀를 얻게 된다.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동화에서 주인공(남자)은 이러저러한 큰일을 해내고 '그 보상으로' 공주와 결혼해 왕이 되거나 행복하게 산다.
이 과정에서 여자의 감정은 요만큼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인터넷 좀 하신다, 또는 요즘 영어 슬랭 좀 아신다 하는 분들이라면 'friendzone'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거다.
만약 당신이 남자고 짝녀를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자.
그녀는 고마워하며 말한다.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귄다.
즉, 한 남자가 여자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이는데, 여자는 그를 그냥 '좋은 친구'로 생각하며 그저 친구로만 대한다. 바로 이럴 때 그가 'friendzone'에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웃퍼 보이지만 사실 이건 여성 혐오적인 말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어서 잘해 줬다고 해도, (앞에서 한 말이지만) 그 사람이 내 감정을 받아 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건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내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똑같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흔히 여자에게 '잘해 주면'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게 되고, 자기 고백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잘해 준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모르겠고, 또 이걸 받는 상대방도 '그가 나에게 잘해 줬다'고 여길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일단 뭐 늦은 밤에 집에 데려다 주거나 여자가 구두를 신은 날에는 오래 걷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도움을 베푸는 행위는, 그냥 본인이 인간이고 상대가 인간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면 울부짖지 않고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 소통을 하는 것처럼. 누가 나에게 '너, 늑대처럼 울부짖지 않고 말을 하는구나.' 하고 나에게 칭찬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그랬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내가 인간인데 당연하지.
그런데 왜 인간이 같은 동료 인간에게 해야 하는 그 친절함과 배려를 남에게 보였다고 해서 당연히 상대방의 마음을 보상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상대방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고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게 아니다. 그런데 특히 남자들은 '내가 이러이러한 행위를 하면 여자가 나를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남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상대방은 내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를 거절한다.
이러면 물론 실망하고 마음이 아플 수는 있다. 하지만 여자는 '친절함'을 주입하면 '마음'을 내어주는 자판기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보상물을 빼앗긴 게 아니다. 그녀는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한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백 과장이 이루다를 사랑했지만 이루다가 그가 아니라 강 대리와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이 웹툰을 읽어 나가며 백 과장과 이루다가 이어지기를 바랐을 수는 있다. 팬이니까. 우리 독자들은 백 과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좋은 사람으로 거듭났는지 알고, 또 그에게 감정적으로 이입을 하게 됐으니까.
그러나 둘이 이어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 '당연히' 이어지기를 기대했다면, 그건 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전반적으로 시즌 3 중반까지는 이루다가 백 과장과 얽히되 어디까지나 루다가 메인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강한 상태로 진행되었는데 시즌 3 후반에는 백 과장이 어떻게든 루다를 살려 보려고 현정이도 만나 보고 강 대리랑 얘기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즉, 백 과장이 '액션'을 취하는 주요 인물이 되는 건데 여기서 루다랑 이어지기까지 하면?
안 그래도 죽은 후 다시 살아나서도 이 웹툰은 루다의 시점이 아니라 백 과장의 시점으로 옮겨갔는데, 만약 백 과장과 루다가 이어졌다면 루다는 꼼짝없이 백 과장의 '개과천선의 보상물'이 되었을 거다.
안 그래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후기에 작가님이 '루다와 백 과장을 이어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렇게 되면 루다가 너무 불쌍하잖아요."라고 대답하셨는데, 과연 옳다.
백 과장이 정말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루다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을 담담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작가가 루다를 통해 작품 내내 보여 주려 했던, 성차별적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무효화될 뻔했다.
정말 재미있고 주제 의식도 좋은, 아주 오랜만에 본 완벽한 웹툰 작품이었다. 작화도 좋고, 깨알 같은 패러디 개그도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유료 결제로 봤지만 나중에는 단행본을 사서 소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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