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저넷 월스, <더 글라스 캐슬>
미국의 칼럼니스트 저넷 월스가 쓴 회고록. 동명의 영화 <The Glass Castle(더 글래스 캐슬)>(2017)의 원작이다. 저자는 회고록을 쓸 만한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 이 책과 저자의 삶 소개는 이 책의 첫 문단만 보여 줘도 충분할 정도로 첫 문단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때 나는 택시에 타고 있었다. 그날 밤 모임에 지나치게 화려하게 입은 건 아닌지 생각하며 차창을 바라본 순간, 엄마가 덤프스터(대형 쓰레기 수납기.-옮긴이) 속을 파헤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막 해가 진 무렵이었다. 사납게 몰아치는 3월의 바람이 맨홀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휘저었고, 사람들은 옷깃을 세우고 인도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차는 파티 장소까지 두 블록 남은 곳에서 꿈쩍도 못 하고 있었다.
첫 문단이라고 했지만 첫 두 문장에서 이미 끝이 났다. 두 문장이 설명하는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인 대조를 이루지 않는가. ‘지나치게 화려하게 입은 건 아닌지’ 생각할 정도로 차려입고 편하게 택시를 타고 모임에 가는, 번듯한 삶을 사는 저자와 대형 쓰레기통을 뒤지는 엄마의 모습.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이게 소설이 아니고 회고록, 그러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저자인 저넷 월스는 당시를 “몇 달 만에 본 엄마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엄마가 날 보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까 봐, 같은 파티에 가던 사람이 나와 엄마가 같이 있는 걸 볼까 봐, 그래서 엄마가 자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내 비밀이 들통날까 봐 나는 황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라고 회고한다. 저자는 혹여 엄마가 자신을 볼까 봐 택시에서 몸을 숙여 그 자리를 벗어났고, 엄마를 그렇게 피했다는 죄책감에 후에 엄마 친구에게 연락했다(엄마와 직접 연락을 하는 대신 엄마 친구를 통하는 게 두 사람이 연락을 하고 지내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엄마와 점심 식사를 하러 만난 중국 식당에서 엄마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간장, 오리고기 소스, 머스터드 소스가 든 플라스틱 통들을 죄다 가방 안에 쓸어 넣”고, “이제 나무사발에 든 건조면까지 집어넣었다”. 번듯한 사회인이 된 딸과 악착같은 엄마. 저자는 이 대조를 다시 한 번 보여 준 후,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저자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세 살 때 트레일러 파크에서 살던 시절, 핫도그를 조리하다가 스토브의 불이 옷에 옮겨가 화상을 입은 기억이다. 세 살짜리가 직접 핫도그를 냄비에 넣어 끓여 조리하다니? 충격적이겠지만 이는 저자가 성장하며 겪어 온 부모의 방임 중 아주 작은 한 일례에 불과하다. 저자의 엄마는 옆집 아줌마에게 부탁해 저자를 태우고 병원에 데려갔고, 세 살짜리 아이였던 저자는 간호사가 준 껌을 먹으면서 “병원에 있으면 음식이건 아이스크림이건 껌이건 뭐건 떨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병원에서 한평생을 살았대도 난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눈치 챌 분도 있겠지만 저자의 가족은 내내 가난했다. 아빠 렉스는 요즘이라면 분명히 알코올 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정도로 술독에 빠져 살았고, 가끔 일자리를 구해도 그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엄마는 교사 자격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예술가로 살았다. 이런 부모들 때문에 로리 언니, 저자 저넷, 남동생 브라이언, 그리고 여동생 모린, 이렇게 네 남매들은 제대로 돌봄도 받지 못하고 알아서 커야 했다. 저자네 가족은 여기저기 옮겨 살다가 마침내 저자가 십대 초반일 때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탄광촌 웰치라는 마을에 정착했다(말인즉슨, 그래도 저자를 비롯한 자녀들이 오랫동안 학교를 꾸준히 다닌 게 이곳에서라는 뜻이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저자 입장에서는 친할머니네 집에 얹혀 살았는데 할머니를 비롯해 엄마, 아빠 등 어른이라는 인간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책을 읽다 보면 부모의 무능함과 방임과 감정적 학대를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한두 개가 아닌데, 개중 하나를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어느 날, 아동복지사가 저자네 집(쓰레기 수거 비용조차 낼 수 없어서 저자가 판 큰 구덩이에 쓰레기를 다 던져 넣고 사는 집)에 찾아왔고, 저자가 엄마에게 명함을 건네며 아동복지사가 왔다고 말한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주의 주말쯤 독서 지도 교사 일자리를 구했다. 차가 없어서 교장인 다른 교사 루시 조에게 부탁해 저자의 엄마 로즈메리를 태워 주게 했는데,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짜증을 내며 출근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로리 언니와 브라이언과 내가 다독여야만 오만상을 찌푸린 루시 조가 녹슨 배기통에서 퍼런 연기를 내뿜는 다트에 탄 채 기다리고 있는 길까지 걸어 내려갔다.” 아이들이 오히려 엄마를 어떻게든 설득해 출근을 시켜야 하는 엄마라니! 우리는 이런 걸 아이의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문제는 엄마가 그렇게 번 돈도 오래가지 못하고 저자는 “또다시 먹을 걸 찾아 학교 쓰레기통을 뒤지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
저자네 엄마아빠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기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넘어가자면, 결국 저자의 언니인 로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집안을 벗어나겠다고 다짐한다. 저자 역시 집을 탈출하고 싶었기에, ‘언니가 먼저 뉴욕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내가 따라갈게’라고 하며 언니와 같이 알바를 해서 돈을 모은다. 남동생 브라이언도 누나들을 응원하며 자기도 알바한 돈을 보태기로 한다. 세 남매가 저금한 지 9개월이 다 되었을 무렵이자 로리가 졸업하기 한 달 전, 아빠가 그 저금통을 갈라 돈을 빼간다. 여기에서 정말 혈압이 올라서 책 읽기를 잠시 멈춰야 했다. 자식들이 집안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탈출하려고 돈을 모았는데 그걸 쏙 빼 가? 하, 진짜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어쨌거나 이 일로 웰치를 떠나야겠다는 남매들의 결심은 더욱더 굳었다. 다행히 어찌어찌 수가 생겨서 로리 언니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일등으로 집을 떠났고, 그다음엔 저자가 11학년(한국식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때 로리 언니가 먼저 기반을 잡아 놓은 뉴욕으로 간다(이때 엄마가 한 말: “네가 보고 싶을까 봐 심란해하는 거 아니야. 넌 뉴욕에 가게 됐는데, 난 여기 처박혀 있는 게 심란한 거야. 이건 공정하지 못해.” 참으로 성숙하시네요! 그게 딸에게 할 말이냐?). 남동생 브라이언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11학년을 마치고 바로 뉴욕행 버스에 올랐다. 세 남매는 뉴욕에서 각자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며 잘 지냈다. 저자는 바너드 대학교를 다니며 일했다. 로리 언니는 막내 모린도 뉴욕으로 데려왔다.
저자가 뉴욕에서 산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강의를 들으러 갈 준비를 하는데 라디오에서 ‘뉴저지 유료고속도로에서 승합차 한 대가 고장이 났는데, 이 차에서 옷가지를 비롯해 가구가 차도에 쏟아져 나오고, 개 한 마리까지 뛰쳐나와 엄청난 정체를 빚고 있다’라는 뉴스를 듣게 된다. 그날 밤, 엄마가 저자에게 전화해서 아빠와 같이 뉴욕으로 이사 왔다고 알린다. 그렇다, 아침에 들었던 그 뉴스는 바로 저자네 부모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로리 언니는 엄마아빠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게 해 주지만, 원체 제도권 내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를 극혐하는 듯한 부모는 당연히 월세도 안 내고 오히려 딸의 아파트를 허섭스레기로 채우기만 한다. 결국 로리 언니는 엄마아빠에게 집에서 나가 달라고 하고, 둘은 승합차에서 살다가 이후 한 건물에 불법 거주로 눌러앉는다. 자식들이 도움을 안 준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노력했지만 본인들이 도저히 개선할 의지가 없는 것을 어쩌랴.
내가 제일 놀라고 경악한 게 바로 이 점이다. 어떻게 노숙자로 살면서 그 삶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그럭저럭 산다고 생각하지? 어떻게 그 삶에 만족을 느끼면서 그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가 있지? 이런 류의 부모에게서 세 남매(막내 모린은 엄마아빠와 살다가 집을 나가 혼자 살 거처를 구하라는 말을 듣고 엄마를 칼로 찔렀으니 제외)가 성실하게 살면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멀쩡한,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게 정말 너무너무 다행이고 기적 같다. 이 회고록을 읽다 보면 부모로서의 책임감, 의무, 자격 등을 생각하게 될 뿐 아니라, 정말로 빈곤층이라는 게 정부와 지역사회의 예산 삭감이나 경제적 기회 창출에 실패한 결과물일 뿐일까, 고민하게 된다. 정말로, 저자 말대로 “이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없더라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나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게 이런 뜻일까. 주위에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받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마음이 없으니 그냥 빈곤하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
이 회고록의 제목이 왜 ‘유리성(the glass castle)’이냐면, 아빠가 그리던 이상향이자 월스 가족을 위한 이상적 집이 바로 유리성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얼마나 이상만 높은, 그러나 현실적이지 못한(집안 가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계속 돈을 받아가기만 했으니까) 사람인지 보여 주는 상징물이라 하겠다. 사실 유리로 성을 지으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울 테고, 보안도 형편없을 것이며,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만 멋져 보이겠지만 실질적으로 효용은 하나도 없는 게, 누가 이런 생각을 한담? 게다가 아빠는 이 ‘멋진’ 유리성을 상상만 하고, 이야기만 했을 뿐 실제로 짓지 못했다.
아빠는 소싯적의 눈부신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 말고도 미래의 놀라운 계획들도 들려주었다. 그중 하나가 유리성을 짓는 것이었다. 아빠의 엔지니어링 기술과 수학적 재능이 하나의 특별 프로젝트에 집약되고 있었다. 아빠는 우릴 위해 사막 한가운데 으리으리한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 유리천장과 두꺼운 유리벽과 유리계단으로 된 집을. 옥상엔 태양전지를 달아서 태양빛을 전기로 바꿔 냉난방과 모든 가전제품에 쓸 것이었다. 심지어는 자체 수질 정화 시스템까지 갖출 계획이었다. 이를 위한 건축 구상과 평면도는 끝낸 터였고, 수학적 계산도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아빠는 어딜 가건 유리성의 청사진을 들고 다녔고, 가끔은 우리 앞에 활짝 펴놓고 각자의 방을 디자인해보라고 했다.
남은 건 금을 찾아내는 일뿐이고, 금은 우리 눈앞에 있다는 게 아빠의 설명이었다. 일단 아빠가 프로스펙터를 다 만들기만 하면, 그리고 우리가 돈벼락을 맞기만 하면 유리성 짓기에 착수할 것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느 크리스마스 때 아빠가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다가 ‘선물로 별을 줄 테니 하나 골라 봐라’ 했다는 일화가 나오는데(저자는 금성을 골랐다), 이게 바로 말만 번지르르한 아빠의 캐릭터를 잘 보여 주는 일화다. 참고로 아빠가 돈이 없었던 건 십장이랑 싸워서 해고당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주체가 아이들을 캠핑에 데려가는 다정한 아빠라면 낭만적인 일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알코올 중독자에다가 아이들을 먹여살리는 데 관심이 없었던 아빠가 하면 그냥 선물을 몇 마디 말로 때웠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이 외에 저자를 괴롭히다가 모종의 일로 친구가 된 디니티아 휴잇이라는 흑인 소녀의 이야기와 그 애와 같이 수영장에서 수영한 일, 고등학교 때 저자가 교내 신문부 인터뷰를 위해 척 예거라는 조종사를 인터뷰하며 자부심을 느낀 일 등, 감동적이고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들도 있다. 아이를 낳기만 한다고 다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저자 부모의 무책임함을 알려 주는 에피소드들이 그것보다 훨씬 많다는 게 함정이긴 한데… 그런 부모 밑에서도 무사히 성장한 저자에 이입해서 보면 인간 승리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깡촌에서 빈곤층으로, 무책임한 부모 아래에서 성장한 실화라면 단연코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영화 리뷰, 책 리뷰)보다 이게 낫다. <힐빌리의 노래>는,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저자가 트럼프 지지자일 줄 (영화를 보고 책 읽었을 땐) 몰랐다고요! 앞으로 <힐빌리의 노래> 대신에 이걸 읽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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