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심완선, <아무튼, 보드게임>
SF 평론가인 심완선 작가가 쓴, 보드게임에 관한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답게 짧고, 가볍고, 재미있다. 작가는 “영혼의 일부”가 “보드게임에 흡수되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보드게임에 푹 빠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보드게임이나 브리지, 마작 등을 할 수 있는 인원의 숫자인 3과 4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4명보다는 3명 모이기가 압도적으로 쉽다. 넷은 더할 나위 없지만 셋이어도 충분히 재수가 좋다. 더욱이 의미심장하게도 숫자 ‘3’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완벽한 숫자다. 이를테면 수학과 철학이 멀지 않던 시절 초기 피타고라스학파는 ‘3’을 가장 고귀한 숫자로 삼았다. 자기 이하의 숫자를 모두 합해 자신이 되는 자연수이기 때문이다. ‘1’은 존재, ‘2’는 대립, ‘3’은 완전함의 상징이다.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확증편향을 마음껏 즐기자). 근거는 많다. 기독교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로서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 삼재사상(三才思想)에 따르면 하늘, 땅, 사람의 천지인이 곧 만물이다. 셋은 곧 세계다. 불교에서 중생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윤회한다. 그리스 신들은 세상을 하늘, 바다, 지하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했다. 삼라만상의 ‘삼’은 숫자가 아니라 수풀이 무성하다는 ‘삼(森)’이지만, 이 글자는 나무 3개로 구성된다. 나무가 셋에 이르면 온 세상을 뜻하는 말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사람도 셋이 모여야 탄탄하다. 게임에서 전투를 위해 파티를 짜려면 탱, 딜, 힐이 기본이다. 전위를 맡아 적들의 공격을 막는 탱커, 튼튼하지는 않지만 공격력이 든든한 딜러, 뒤에서 회복과 지원을 맡는 힐러 구성이다. 오래전부터 효과가 입증된,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조합이다. 이런 구성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설파했던 바와 상통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3요소에 따라 지혜, 용기, 절제라는 3가지 덕성을 정했다. 그리고 각 덕성을 국가의 통치자, 수호자, 시민의 역할로 연결했다. 여기에는 탱, 딜, 힐의 묘리가 담겨 있다. 통치자, 즉 탱커는 앞서서 길을 찾거나 지혜롭게 전술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맡는다. 수호자가 되는 딜러는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데 집중한다. 힐러는 절제의 미덕을 지니고 파티원들의 체력이 적절히 유지되도록 그들을 뒷받침한다. 구성원들이 자기 클래스에 맞는 미덕을 충실히 실천하면 정의가 구현된다. 과연 고전에는 진리가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보드게임을 해 본 적이 거의 없고, 그나마 한 번 권유받았을 때도 거절한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하는 게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나에겐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르는 사람과도 즐겁게 게임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감탄했다. 아니, 이럴 수 있다니! 사실, 저자는 첫 꼭지부터 이렇게 썼다.
『아무튼, 보드게임』 같은 책은 누가 읽는 걸까? 보드게임과 책 양쪽에 긍정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이지 않을까(제발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뒤에서 바로 드러나겠지만 나는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보드게임이 (기본적으로는) 타인과 직접 교류해야 하는 종류의 놀이라 그렇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려면 타인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약속을 잡고, 게임을 고르고, 여가 시간을 소모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뜻을 모은다. 게임 안에서는 경쟁하더라도 총체적으로는 하나의 합의를 이룬다. 사람을 만난다는 수고를 들일 만한 놀이를 하자는 합의다. 홀로 즐길 만한 매체와 콘텐츠가 넘쳐 나는 지금 시대에 굳이 보드게임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혼자서는 누리기 힘든 밀도 높은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즐기려면 어느 정도는 타인에게 우호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믿기에는 그렇다.
타인과 모이면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낯선 사람을 너무 경계하기보다는 반갑게 대하는 그런 분이신 듯.
게다가 저자는 심리학 전공을 살려 MBTI 뺨치는, 성격 유형 분류법까지 만들었다. 만족감의 출처로 성취형(A)과 교류형(F)을 나누고, 경쟁에 대한 반응으로 견제형(I)과 자립형(S)을 구분하며, 마지막으로 경험에의 개방성으로 상상형(V)과 반복형(C)을 나누는 식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게임을 이기는 데서, 잘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으면 성취형,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얻으면 교류형이다. 게임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타인의 플레이에 끼어들면 견제형, 자신의 길을 이어가는 플레이를 선호하면 자립형이다. 게임으로 인한 낯선 경험, 예를 들면 새로운 게임, 또는 같은 게임이더라도 변화무쌍한 플레이를 선호한다면 상상형이고, ‘아는 게임’을 환영한다면 반복형이다. 아니 이렇게 성격을 구분할 수도 있다니, 작가님 정말 보드게임에 몰입하셨군요…!
보드게임을 해 본 적도 별로 없고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보드’게임’이라서 게임이나 도박에 대한 이야기(이론적인 것)도 자주 언급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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