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헬렌 헤스터, 닉 스르니첵, <애프터 워크>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사람들이 어떻게 더 나은 ‘일 이후의 시간(애프터 워크)’을 추구하고 노력해 왔는지를 돌아보는 책. 이 책은 아주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노동을 하는 주체를 여성이라고 상정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라는 점이다. 이 재생산 노동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이 진정으로 개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고, 그것이 사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재생산 노동도 여느 노동처럼 지루하고, 단조롭고,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재생산 노동에는 물론 아이와 놀아주는 것, 친구들을 위해 요리하는 것, 나이 든 이웃을 돕는 것처럼 즐겁고 만족스러운 측면도 있다. 하지만 재생산 노동의 많은 부분이 허드렛일이며, 숨 돌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특히 고단하게 느껴진다–혹사당하는 돌봄 노동자들은 (정신 건강이 악화되는 동시에) 자신이 소진되고 있다고 느낀다. 재생산 노동의 많은 부분이 말 그대로 ‘끝이 없다’. 일찍이 자가 청소 주택을 발명한 사람은 집안일을 두고 말했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따분한 일. 굳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도대체 누가!’
앤절라 데이비스Angela Davis 역시 재생산 노동의 젠더화된 분담에만 집중하는 제안들을 비판하면서 ‘가사노동의 성차별을 없앤다고 해서 가사노동의 억압적 성격이 진실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여자든 남자든 흥미롭지도, 창의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은 일에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이런 주장들이 재생산 노동을 부분적으로라도 최소화할 동력이 된다.
물론, 이 지점에서 확실히 해야 하는 건, 무보수 노동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여성을 임금 노동 시장에 들여보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자유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에 대항하여 우리는 무보수 노동을 줄여야 하는 이유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도, 단순히 무보수 노동이 힘들어서도 아니라고 주장해야겠다. 무보수 노동을 반드시 줄여야 하는 이유는 그로써 모든 의미 있는 자유의 전제 조건인 자유 시간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일에 대항하는 투쟁은–어떤 형태든–자유 시간을 위한 싸움이다.’ 자유 시간이 주어질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어떤 인생의 길에, 프로젝트에, 정체성에, 기준에 헌신할지–결정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가족을 위한 시간을 더 내는’ 문제가 아니요, 더 많은 임금노동 시간을 확보하는 문제도 아니요, 워크-라이프 밸런스라는 미신에 가까운 개념과도 무관하다. 자유 시간을 위한 싸움은 궁극적으로 자유 자체의 영역을 열어젖혀서 개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활동을 극대화시키는 문제다.
현대인들은 모두 알다시피,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예전보다 집안일을 상대적으로 덜 힘들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빨랫방망이로 옷을 칠 필요가 없이, 세제와 세탁기를 이용해 옷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허리와 무릎이 아픈 자세로 바닥을 닦을 필요도 없이 스팀 청소기를 이용하면 간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집안일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코완의 역설’이 이를 보여 준다.
앞서 소개한 기술들은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의 가정에서 표준이 되었다. 그런데 수많은 신기술의 등장과 상반되는 놀라운 사실이 1970년대에 밝혀졌다. 가사에 들어가는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고 있지 ‘않았다’. 1974년에 가사노동이 의외로 변하지 않았음을 처음 지적하는 논문을 쓴 조앤 바넥Joann Vanek은 전업주부들이 1924년에 가사노동에 주 52시간을 들인 데 비해, 1960년대에는 55시간을 들였다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밝혀냈다.
오늘날 ‘코완의 역설’로 불리는 이 현상에 이름을 빌려준 역사학자 루스 슈워츠 코완Ruth Schwartz Cowan은 어째서 노동을 절감시켜주는 모든 장치에도 불구하고 가정 내에서 노동이 줄어들지 않았는지를 설명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187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가사노동 시간은 감소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경제 발전의 단계에 놓인 12개국을 조사한 훗날의 연구에서도 기술이 가사노동의 총량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다른 연구들에서도 다수의 국가에서 이런 폭넓은 경향성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를 탐구해보면, 기술과 사회 재생산 노동이 어떻게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유는? 이전에는 여러 사람들(대개는 가정 내 하인들)이 다 같이 부담하던 것이, 사회가 변화하면서 집안일이 ‘가정주부’라는 한 인물에게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느라 이전처럼 집안일을 도울 수 없었으며, 남자들에게는 온 가족의 밥벌이를 책임지는 생계 부양자 역할이 주어졌다. 가사노동을 가정 내 하인에게 의존했던 부유한 가정은 점점 ‘일손’이 줄어드는 변화를 겪었다. 가정 내 하인의 공급 부족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 주장은 서구 사회 기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그럭저럭 들어맞는 것 같다. 아주 옛날에는 양반집에 하인이 딸려 있게 마련이었고, 1980년대쯤 되어 사라지긴 했지만 일하는 집에 얹혀 살면서 집안일을 해 주는 ‘식모’들이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가정 내 하인을 대체할 물건으로서 신기술 제품이 도입되자, 바깥에 외주를 줄 수 있었던 일도 집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가정용 세탁기가 보편화되기 전에 세탁은 보통 세탁부나 세탁소에 맡겨졌는데, 집에서도 빨래를 할 수 있게 되자 가정주부가 이를 맡게 되었다. 또한 ‘집 안의 산업혁명’이 기존의 일거리를 줄이거나 없애는 대신에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의류의 대량 생산이 보편화되자 사람들은 옷을 더 많이 샀고, 세탁해야 할 옷도 더 늘어났다. 화장실이 집 안에 생기자 그것도 청소해야 했고(집의 다른 구역보다 자주), 집에 딸린 잔디밭이 넓어지고 정원 기술이 도입되자 이를 관리하는 데에도 엄청난 노동과 에너지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현재 ‘스마트 홈’ 기술로 삶이 훨씬 편리해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노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 기반 시설의 웅장한 발전이 가정 내 일의 성격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노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건 왜 그럴까? 첫째로, 스마트 홈은 주로 노동 자체의 절감보다 ‘편의’를 지향한다. 둘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편의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시간을 절약하거나 일의 양을 줄이는 게 아니라 어렵고 성가신 부분을 없앰으로써 보다 편안하게 일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편의성은 생산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주관적인 사용자 경험의 문제다. 애초에 편의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주 작은 규모에 적용될 소지가 있으며, 실제로 스마트 홈의 여러 면이 그런 규모에서 기능한다. 작은 일의 자동화(예를 들어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것)와 집 관리를 보조하는 것(예를 들어 우유가 떨어지면 거주자에게 알리는 것)은 전부 살림의 곤란한 멀티태스킹을 줄여주는 방식이라고 홍보된다. 이 지점에서 궁극적으로 스마트 홈의 야망이 일상에서의 작은 마찰을 줄이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게다가 ‘스마트 홈’ 기술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누리려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일거리도 수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로봇 청소기는 인간 대신 청소를 해 주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집을 정리하게 만든다. 바닥에 잡동사니를 놔두면 안 된다든지, 모퉁이와 틈새에 로봇 청소기가 끼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야 한다든지, 계단은 로봇 청소기가 추락할 수 있으니 막아야 한다든지 등등. 또한 스마트 홈이 만들어내는 일거리는 기존의 젠더화된 위계를 강화시키는 듯하다. 현실적으로 가정 내 IT 기기를 일반적으로 남성이 관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디지털 가사 노동의 증가는 가사 노동을 ‘평등하게’ 재분배하는 게 아니라 ‘디지털’ 가사 노동은 맡는 것은 남성, ‘전통적’ 가사 노동을 맡는 것은 여성이라는 젠더화된 구분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젠더화된 가사 노동, 재생산 노동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시도된 여러 대안적인 공동 주택이나 건축 프로젝트 등을 소개한다. 심지어 레즈비언 분리주의 공동체까지! 여러 사람들이 가사 노동을 줄일 수 있는 디자인의 건축을 시도했으나, 여러 면에서 ‘어차피 재생산 노동을 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젠더화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저자는 공동 돌봄, 공공 호사, 시간 주권이라는 원칙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첫 단계로 핵가족의 사적 돌봄에 특권을 주는 법적﹒문화적 장치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무섭고 냉정한 말처럼 들리지만, 핵가족이 아니어도 공동체가 서로를 돌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가족이 아프면 간병 휴가를 낼 수 있지만, 친구가 아프면 그럴 수 없는 것이 ‘핵가족의 사적 돌봄에 특권을 주는’ 장치이다. 아이나 노인들을 돌보는 일도 가족이 맡아서 할 게 아니라 공공화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들고 ‘나도 필요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공유 주방의 개념이다. 요리는 “특히 고성능 장비와 규모의 경제에서 큰 혜택을 입을 수 있는” 활동으로, 이미 여러 회사에서 그런 혜택을 누리기 위해 구내 식당을 운영한다. 요즘 어떤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는 조식 서비스가 있다는데, 이런 게 더 많이, 널리 퍼져야 하지 않나 싶다.
내가 지금까지 간단히 정리했듯이, 일이 끝난 이후(애프터 워크) 개인이 자유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는 젠더화된 재생산 노동을 줄이고 이를 공평하게 재분배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공동체의 힘과 공동 자금을 이용해야 한다. 젠더라는 렌즈를 통해 이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잊으면 안 된다. 입법가들, 정치인들뿐 아니라 건축가들과 삶을 설계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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