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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송은주, <드레스는 유니버스>

by Jaime Chung 202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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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송은주, <드레스는 유니버스>

 

 

<위키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클라우드 아틀라스> 등 많은 영미 소설을 번역해 온 번역가 송은주가 자신이 사랑하는 영문학 속 여주인공들을 큐레이션한 에세이. <마담 보바리>의 에마 보바리, <제인 에어>의 제인 에어,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 대시우드,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페이 뷰캐넌, <시스터 캐리>의 캐리 마덴다, <순수의 시대>의 엘렌 올렌스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드보아, <테레즈 데케루>의 테레즈 데케루가 그가 사랑하는 여주인공들이다.

 

저자가 각 작품 속 여주인공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여주인공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과 작품 전체에 관해서도 코멘트하므로, 일종의 문학 비평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인스타그래머블한 에마 보바리의 삶>이라는 장에서 현대인과 에마 보바리의 공통점을 찾은 부분이었다. 크게 공감했다.

에마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근원은 바로 책이다. SNS가 있기 전에 우리에게는 책이, 소설이 있었다. 에마는 소녀 시절 수녀원에서 삯바느질로 연명하는 몰락한 귀족 출신 여성이 은밀히 빌려준 로맨스소설들을 통해 화려하고 눈부신 허구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 책들의 내용은 “사랑, 연인, 애인, 외따로 떨어진 별채에서 쓰러지는 박해받은 부인, 역참마다 죽임당하는 마부, 페이지마다 혹사당해 죽는 말, 음침한 숲, 어지러운 마음, 맹세, 흐느낌, 눈물과 입맞춤, 달빛 아래 조각배, 작은 숲속 나이팅게일, 사자처럼 용감하고 어린 양처럼 유순한 데다 더할 나위 없이 덕망 높으며 늘 옷차림이 세련된 것은 물론이고 물동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신사들”로 가득했다.
어쩌면 에마가 탐독한 책들은 ‘판타지 로맨스 웹소설의 19세기 버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책들에 빠진 에마는 “오래된 저택에서 허리가 기다란 드레스를 입은 성주 부인처럼” 살면서 “아치 밑에서 돌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손으로 괸 채 들판 저 끝에서 하얀 깃털을 단 기사가 검정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에마는 메리 스튜어트, 잔 다르크 같은 역사 속 비극의 주인공들을 숭배했다. 자, 이런 꿈 많은 소녀가 과연 순하지만 둔해 빠진 의사와 결혼해 답답하고 지루한 시골 중산층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모두가 돈키호테나 에마처럼 삶이 허구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를은 온종일 왕진을 다니고 저녁이면 ‘아내가 기다리는 편안한 집’으로 돌아오는 소박한 일상에 더없이 만족하는 인물이다. 에마는 검술을 배워보겠다거나 파리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이 없는 이 고지식한 모범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에마가 사랑했던 로맨스물 속 낭만적인 남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샤를과의 결혼 생활은 또 다른 지겨운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에마는 수도원의 옛 친구들은 틀림없이 재치 있고 기품 있고 매력적인 미남들과 결혼해 “도시에서, 거리의 소음과 극장의 웅성거림과 무도회의 광채를 즐기며 가슴이 부풀고 관능이 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이 19세기 프랑스 시골구석에서 인생이 소설과 똑같기를 기대하는 새 신부가 느끼는 억울함은 21세기의 우리가 SNS를 돌아다닐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나만 빼놓고 모두가 신나고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나만 뒤에 남겨놓고 인생이 흘러간다.

 

<시스터 캐리>의 캐리 마덴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는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오늘도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이라는 저자의 해석을 읽다 보면 캐리에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스터 캐리>도 나중에 읽어 봐야지.

<순수의 시대>는 저자의 말마따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는 남주인공 아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용감한 뉴욕 여자들의 이야기다.” 솔직히 <순수의 시대>를 읽은 지가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났지만, 이것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개인적으로 테네시 윌리엄스를 좋아하기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다룬 장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미국에서 남부인들의 심리와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저자의 설명 덕분에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블랑쉬의 경우, 그가 짊어진 어두운 과거의 짐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블랑쉬가 남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의 개인사에 더 넓은 역사적 맥락을 부여한다. 블랑쉬는 잘못된 때에, 잘못된 장소에 도착한 여주인공이다. 남부 대농장 저택에서 자란 온실 속 화초 같은 블랑쉬에게 강렬한 색채와 요란한 재즈 음악이 넘치는 뉴올리언스의 빈민가는 맞지 않는다. 첫 등장 장면부터 그의 모습은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묘사된다. “그 섬세한 아름다움은 강렬한 햇빛을 피해야 한다. 그녀의 흰 옷뿐 아니라 불안정한 태도에는 어딘가 나방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화초를 키워낸 세계, 그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던 세계가 이제 더는 현실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포크너 작품의 많은 인물은 남부의 썩어가는 영광스러운 대저택에서 살아 있는 시체가 되는 쪽을 택한다. 포크너의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가문을 지나치게 중시했던 오만하고 시대착오적인 아버지 때문에 혼기를 놓치고, 전쟁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신남부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저택에 유폐한 남부 귀족 에밀리에 관한 이야기다. 수십 년간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살아가던 에밀리가 죽었을 때, 대체 그 집 안은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에 차서 찾아온 마을 사람들은 이층 침실에서 먼지 쌓인 침대에 고요히 누워 있는 미라 같은 시체를 발견한다. 에밀리를 버리고 떠나려다 독살당한 애인 호머였다. 그 시신은 에밀리가 결코 놓을 수 없었던—그리고 그쪽에서도 놓아주지 않았던—남부의 과거 그 자체이다.

블랑쉬는 뉴올리언스까지 와서도 방탕한 주색잡기, 노예제의 죄악으로 얼룩진 추악한 선조의 유령들, 아름다웠던 대저택 벨 레브의 기억을 끌고 다녀야 한다. 블랑쉬에게 찬란했던 남부의 과거는 영광스러운 유산이자 저주스러운 짐이다. 스텔라는 이미 한참 전에 무너져가는 대저택과 죽어가는 친족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책임을 언니에게 떠넘기고 고향을 떠나 새 삶을 찾았지만, 블랑쉬는 너무 늦었다. 거센 파도가 쓸고 간 해변에 남겨진 조개껍질처럼,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블랑쉬는 러시아 혁명 이후 외국으로 뿔뿔이 망명한 귀족들이나 6·25 전쟁 후 토지를 몰수당하고 월남한 양반들 같은, 몰락한 구체제의 잔여물이다. 부패와 죄악으로 얼룩졌지만 한때 장엄했던 그 체제와 함께 사라지든, 잽싸게 태세 전환에 성공해 새 시대의 흐름을 타든,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은 치욕과 빈곤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스탠리와의 갈등 또한 단순히 서로의 성격 차이를 넘어서, 구남부의 귀족 계급과 신남부의 이민 노동자 계층 간의 사회적 충돌이기도 하다.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또는 소설 속 여주인공들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 봄직하다. 책 맨 끝에 “여덟 명으로는 아쉽다고 느낄 독자들을 위한” 매혹적인 여주인공들 큐레이션목록이 첨부돼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부터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까지, 41편의 작품에서 빛나는 여주인공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표이다. 역시나 더 많은 여주인공들을 만나 보고 싶을 때 유용하니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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