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하재영,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저자의 어머니와 저자가 같이 쓴, 저자 어머니의 회고록이라고 할까. 어머니가 먼저 당신의 삶을 구술하면 이를 저자가 받아 적고, 저자가 자신이 보고 느낀, 그리고 해석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썼다. 어머니와 딸이 번갈아 가며 서술하는 구조 덕분에 기성 세대와 (나름대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가 겪은 삶, 생각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제목에 쓰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그녀는 한평생 어머니에게 헌신했는데, 저자는 이 문장을 책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이 문장에서 (여성) 작가가 되는 일이 불러일으켰던 ‘절망’을 읽어낸다. 디킨슨 시대의 여성 작가는 선배 여성 문인이 전무한 상황에서, 또한 남성 작가가 여성을 창작의 대상(뮤즈)으로는 용납하지만 창작의 주체(동료)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병들 정도로 심한 고립”, “미칠 듯한 소외감”, “마비를 일으키는 모호함”4과 싸워야 했다. 두 학자에 따르면, 디킨슨은 “병든 생모와 고통받은 문학적 어머니”5가 옮기는 절망을 들이마셨기에 그녀의 편지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나의 오독을 덧붙이자면, 디킨슨이 말하는 ‘어머니(a mother)’는 현실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 원형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 심리학자들은 ‘어머니 원형’이라는 강렬한 집단 무의식이 실제 어머니보다 내면에 더 깊숙이 침투해 자아와 관계 맺는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현실 어머니와 무관하게 어머니 원형으로부터, 모성의 절대성으로부터, 자기 정체성과 대결하는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로부터 벗어나려는 분투이다. 또 한 번 오독하자면, 디킨슨의 고백은 이 시대 딸들의 선언이다.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삶의 한때를 바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마침내 어머니의 뜻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딸에게는 ‘어머니가 결코 없다’. 이 선언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와 저자의 관점이 극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부분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나대는” 아이였다. 더 나쁘게 표현하면 “설치는” 아이였다.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면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확신에 차서 앞으로 나섰고, 선생님이 발표할 학생을 찾으면 문제를 맞히겠다는 의욕에 부풀어 팔을 높이 들었다.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그냥 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잘’ 해낼 수 있다. 엄마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것, ‘특별한 사람’이라는 나의 자아상이었다. 또 한 번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는 나를 “꺾으려” 했다. 과도한 자신감과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진 “나대는” 여자아이는 “꺾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아동기에 엄마가 일관되게 가졌던 교육적 신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는 왜 그래야 했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말이 없기에 다시 물었다. “여자아이라서?” 엄마가 대답했다. “응, 여자아이가 나대면 미움받으니까.” 잠시 뒤 엄마가 말했다. “미안해.”
이제 와서 엄마에게 왜 나를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았느냐고, 더 많이 칭찬하고 격려하지 않았느냐고 불평하고 싶지 않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모르는 체하고, 여성성에 대한 협소한 정의를 모르는 체하고, 여성이 받아들여야 했던 불합리한 가치관을 모르는 체하고 문제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돌리고 싶지 않다. 엄마는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음 세대 여성으로서 나의 의식과 차이가 있더라도, 엄마의 문제라기보다 시대가 가진 여성상과 양육관의 한계일 것이다. 엄마는 나를 “꺾었다”고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꽃피우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
이건 읽는 나도 어머니의 입장과 딸(저자)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어서 안타까웠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 넘치는,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나대는’ 아이에게 동갑내기 아이들이 친절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하지만 딸로서 엄마에게 응원받고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아니까. 자식, 그중에서도 특히 딸을 키우는 일이 힘든 건 아무래도 현실이 생각이랄지 이론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이가 밖에서 자유롭게 놀도록 허락해 주고 싶지만 요즘 세상에 흉흉해서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인간들이 많으니 밤 늦게, 또는 집에서 너무 멀리 가지 못하게 막고 싶어지는 이중적인 마음이랄까. 결국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딸들, 여자들을 위협하는 자들의 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아들들을 잘 키워야겠지요^^…
너희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같은 동네에서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그러는 거야. “딸만 둘이라서 얼마나 걱정이 크세요. 여자아이는 조심시킬 일이 많잖아요.” 염려하느라 건넨 말인지 몰라도 기분이 나쁘더라고. 내가 그랬어. “아들들 교육 잘 시키면 딸들이 조심할 일이 없겠지요.” 1980년대였고 나도 기존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있었어.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충격적일 정도로 좋았던 부분은 이거다. 맥락을 조금 설명하자면, 저자가 십 대 시절 남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이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의 일기장을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 사실은 엄마의 일방적 약속이라고 해야겠지만, 엄마로서는 합의했다고 믿었을 약속이다. 나는 엄마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비밀을 가지지 않는다. 엄마는 나를 투명하게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기장을 읽기 전까지는. 엄마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남자아이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노의 핵심은 딸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딸이 자신이 알던 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므로, 엄마는 배신감에 휩싸인 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가 사라졌다는 상실이 왜 하필 “배신감”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에서 단서를 찾았다.
…… 다행스럽게도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이런 지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이를 격려한다. 어머니 자신도 체념한다. 그녀는 남자에 대항한 싸움이 승산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비애의 어머니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한 명의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되새기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진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주장은 강해진다. 그녀들의 관계는 훨씬 더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분신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모호성을 딸에게 모두 투사한다. 이 분신의 이타성 (異他性)이 확립되면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진단을!? 그러니까 남자애는 어려도 ‘남자’니까 자신이 온전히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들이 자신의 말을 다 따를 거라고 기대조차 안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는 ‘여자’니까 온순할 거고 자기 말을 잘 따를 거라고 기대한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여자애가 자기만의 세상과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면 ‘배신감’을 느낀다는 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사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20세기에 살았으니 그렇게까지 ‘옛날’ 사람은 아니지만) 엄마-딸 관계는 이랬던 걸까. 정말 너무 놀랐다.
‘딸’인 사람(하하, 내가 의도적으로 ‘사람’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여성을 의미하기 위해 썼다는 점을 눈여겨 봐 주시라. ‘딸’인 사람은 여자일 수밖에 없는데! 어떤 이들이 오직 ‘남자’를 의미하기 위해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게 하도 고까워서 나도 한번 해 봤다)은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읽고 나면 엄마와 이야기해 보고 싶어진다.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느냐고. 저자도 분명히 밝히듯, 자신의 글이 가지는 한계, 즉 어머니의 어머니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엄마의 엄마에 대해 물어보고, 할머니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더 큰 여성의 연대를 만드는 셈이다. 독자들이 그렇게 한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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