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멀리사 모어, <HOLY SHIT: 욕설, 악담, 상소리가 만들어낸 세계>
아시다시피, 제목으로 쓰인 ‘holy shit’은 ‘아이고, 이런, 빌어먹을’ 정도로 쓰이는 상스러운 말이다. 이 책은 영어의 상스러운 소리가 가진 풍부한 세계를 탐구한다. 상스러운 소리라 하면 일단 서약어(”by God’s bones”), 외설어(성기처럼 외설적인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말), 비속어(’shit’), 인종 비하어(’n****r’)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고대 로마 시대에서 시작해 기독교가 퍼져나가던 시기, 중세, 르네상스 시대, 빅토리아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 꽃피었던(?) 상스러운 소리를 당시 시대적 특징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자리잡던 시기에는 기독교의 신인 야훼가 당시 히브리인들이 믿던 신들(비바람과 전쟁을 주관하는 가나안의 신 바알, 바알의 아내인 전쟁과 다산의 여신 아나트/아스다롯, 폭풍의 신 하다드, 딜의 신 신, 바다를 관장하는 가나안의 신 얌, 죽음의 신 모트, 또 다른 달의 신 야리, 치유의 신 에쉬문, 역병과 전염병의 신 데베르와 레셉,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둑, 모압의 주신 그모스, 밀곰과 몰록, 다산과 농작물의 신 다곤, 하반신이 물고기인 다산의 여신 데르케토, 태양의 여신 샤마슈, 관개의 신 아트타르 등등)과 ‘경쟁’했고, 야훼는 유일신으로 홀로 숭배받기를 요구했다.
맹세는 진정한 유일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하느님의 목적을 달성시켜줄 핵심적 무기였다. 하느님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 호소한다는 뜻이었다. 우리 말에 귀 기울여 발언의 진실성을 평가해달라고, 우리가 혹여 거짓된 발언을 했거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벌을 내려달라고 하느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때 하느님을 걸고 하는 서약은, 하느님이 어디에나 계시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어디에서 하건 들을 수 있음을,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우리가 한 말의 진실성을 판가름할 수 있음을,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우리를 벌할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야훼의 라이벌 격인 전쟁의 신 바알을 걸고 맹세한다면, 이는 곧 하느님이 아닌 바알의 전지전능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이러한 가능성을 깊이 염려한 듯하다. 「예레미야」에서 하느님은 배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와 “나를 두고!” 맹세하라고, “이 산 저 산”에서 숭배하던 다른 신들이 아닌 그를 걸고 맹세하라고 이야기한다.(「예레미야」 3:23)
서원은 야훼처럼 영향력의 확대를 꾀하는 신에게 매우 유용한 관행이었다. 만약 한 사람의 소원이 이뤄지면, 하느님이 협상에서 자기 몫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이 명백해지므로, 하느님의 공로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십중팔구 소원 당사자가 무언가 잘못했거나 야훼를 화나게 한 탓일 터였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데는 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는 법이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지불’할 때 스스로 그 관계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앙을 굳건히 하는 문제에 건강한 경제 원칙이 적용된 경우랄까.
즉,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와 서원을 독려함으로써 야훼는 수많은 신 가운데 별다른 존재감 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신에서 최고의 신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하느님으로 더 쉽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 와서는 사람들이 하도 신의 이름을 대고 맹세를 했기에 신이 갈가리 찢길 위험에 처했다. 당시 가장 많이 쓰인 표현은 “신의 뼈에 맹세코(by God’s bones)”였는데, 사람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혼을 두고”, “하느님의 고귀한 심장을 두고”, “그리스도의 피를 두고”, “하느님의 팔을 두고”, “하느님의 손톱을 두고” 등등 신의 여러 신체 부위에 대고 공허한 맹세를 해댔다. 중세 문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면죄부 관리인은 부적절한 맹세를 맹비난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부적절한 서약어를 지적한다.
(…) 그것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식의 서약어를 남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지를 찢는 자이며, 유대인보다도 더 악질이다. 유대인들은 그분의 몸을 단 한 번 찢었을 뿐이지만, 하느님의 신체 부위를 두고 맹세하는 자들은 그분을 매일매일 새롭게 찢어발기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분의 뼈를 부러뜨리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신체 부위를 두고 맹세하는 자들은 그분의 뼈를 부러뜨리고 팔다리를 하나하나 부러뜨리다가 급기야는 온몸을 부러뜨리고 만다”. 하느님의 몸을 두고 하는 서약의 문제점은, 하느님을 ‘찢는다’는 데 있었다. 신의 몸을 조각조각 해체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그리스도는 물질적 육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속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분이었다.
이렇듯 신성한 몸을 서약어는 위협한다. ‘하느님의 손톱을 두고’ 하는 맹세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손에서 손톱을 뜯어내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 하느님의 피조물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창조주에게 그러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답은 성체성사에 숨어 있다.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는 사실상 성체성사의 뒤틀린 버전이니까. 성체성사 중에 사제는 제병을 하느님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축성문’을 낭독한 뒤, 성체를 손으로 부러뜨린다. 맹세 중에 사람들은 전형적인 서약어를 중얼거림으로써 하느님의 몸을, 오직 말로써 부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신은 겨우 숨통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부흥하고 자본주의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성체성사에서든 맹세를 통해서든 하느님의 물리적 몸을 만지지 못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서약어의 효과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성체성사에서 나누어 주는 빵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의미에서 신의 몸이었고, 실질적으로 그의 몸을 맛보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봉건주의 시대가 가고 자본주의가 도래하자, “시장은 거듭해서 정직성을, 더 빠른 속도로 요구했다. 거래 전에 상품이 고품질이라고, 가격이 정당하다고, 물건이 제시간에 배달될 거라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시 말해, 만약 상인이나 생산자가 자신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감옥에 가거나 파산에 직면하는 등 실질적이고 법적인 처벌이 뒤따랐으므로, 초자연적인 구속력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신이나 신의 신체에 두고 맹세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외설어가 변화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저자가 유머 감각도 좋아서 책 곳곳이 정말 웃긴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예를 들어서 보여드려야 할지… ‘f-word’와 민망한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말, 성행위를 뜻하는 표현이 난무하는 곳을 피해 개중에 가장 ‘전 연령 가능’인 부분을 고르자면 이것일 듯하다. 물론 현대 기준으로 그렇다는 거고, 빅토리아 시대 기준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 테니 만약에 빅토리아 시대에서 타임 워프하신 분이 계시다면 아래 인용문들은 읽지 않고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이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inexpressi-ble(1793), 묘사할 수 없는 것indescribable(1794), 잡다한 것etcetra(1794), 언급할 수 없는 것unmentionable(1823), 형언할 수 없는 것ineffable(1823), 없어서는 안 되는 것indispensable(1823), 이름을 내걸 수 없는 것innominable(1834~1843), 설명할 수 없는 것inexplicable(1836), 뒤이은 것continuation(19세기 중반)이었다. 이것은 무엇일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1867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다음 예문을 인용한다. “신발을 벗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은 걷어 올리시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럼 1823년의 이 예문은 어떤가? “리스턴은 다리 절반까지 내려오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을 입고 있다.” 이제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이것은 바지trousers였다.37 1889년 『세기의 백과사전The Century Cyclopedia』은 이 “의상 품목을 정중한 집단에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 대체 바지라는 말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큰 문제는 바지를 벗을 때 사람이 벌거벗게 된다는 점이었다. 또한 바지의 모양은 남자의 다리를 드러내는데, 남자가 다리를 가졌다는 것은 그 위에 다른 신체 부위를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런가 하면 다리leg 역시도 정중한 사회에서는 사용하지 않아야 마땅한 단어 중 하나였다. 하지limb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고, 더 완곡하게는 아래 가지lower extremity라고도 일컬었다.
(…)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을 때 나는 친하게 지내던 한 젊은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풍경을 더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어느 바위에 올라서 있다가 그만 미끄러져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정확히는 정강이를 긁혔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조금 절뚝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리를 많이 다치셨나요?”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적잖이 놀랐거나 불쾌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무슨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녀에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언짢아하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얼마간 망설이던 그녀는, 나를 잘 아니까 말해주는 건데, 숙녀 앞에서는 다리라는 단어를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불찰을 사과하며 나는 실수의 원인을 내가 오로지 영국 사교계에만 익숙하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러고는 분명 미국의 가장 정중한 모임에서도 그러한 품목을 이따금 언급해야 할 때가 있을 텐데, 그럴 때 주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언급하기에 적당한 명칭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없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녀는 하지라는 단어가 사용된다고 대답하고는 이렇게 첨언했다. “글쎄, 저는 그리 까다로운 축은 아니랍니다. 지인 중에는 테이블의 하지라든가 피아노의 하지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도 더러 있는 걸요.”
이 책에는 상스러운 소리가 예삿일처럼 등장하니(당연함, 책 주제가 그거임) 심약하신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번역도 그 정서를 잘 살려서 잘돼 있기 때문에,인간의 온갖 신체 부위와 온갖 욕들을 한 권 내내 읽어도 충격받지 않으실 분들만 읽으시길 권한다. 하지만 언어학적인 관심이 있으신 분, 또는 역사 이야기에 흥미가 있으신 분들, 또는 그냥 십 대 남자애들처럼 욕만 들어도 키득키득 웃으며 ‘금지된 것’에 흥분하시는 분들은 아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배운 것도 많은 책이다. 무엇보다, 상스러운 욕설에 관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욕설을 쓰면 좋지 않다고 비판하거나 독자를 가르치는 태도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미 사람들이 욕을 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순수하게 욕의 역사와 그 의미의 변화 등에 집중하기 때문에 욕설을 하면 사람이 수준 낮아 보인다든가 하는 그런 설교조가 아니라서 너무나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이 책의 최고 매력이라고 본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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