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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권남희, <스타벅스 일기>

by Jaime Chung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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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권남희, <스타벅스 일기>

 

 

<혼자여서 좋은 직업> 이후 또 재미있게 읽은, 일본 문학 번역가 권남희 님의 에세이. 저자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매번 시켜 먹은 음료와 그날 스타벅스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처럼 기록해 두기 시작했는데, 그게 모여서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이 콘셉트로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에세이 형식으로 바뀌었다고.

스타벅스라는, 이제는 한국인들에게에 익숙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이 소소하게 재미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떠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 떠드는 내용도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저자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친절을 나누기도 하고, 텀블러를 깜박 잊고 가져오지 않아 에코별을 적립하지 못해 아쉬워하기도 한다. 스타벅스 음료를 많이 마셔 본 분들은 이 책에서 언급되는 음료들 거의 다 아실 듯(나는 커피를 안 마셔서 잘 모른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이라면 크게 감정 기복 없이, 소소하게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저자의 어머님이 치매로 입원해 계시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글이 엄청 무겁거나 슬픈 분위기는 아니다. 여전히 밝고 가벼운 톤. 옆자리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불평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 그 괴로움마저 유머로 승화하는 저자 덕분이다. 게다가 저자의 따님인 정하 양이 등장할 때는 대체로 이야기가 훈훈해진다. 읽으면서 소소하게 웃겼다 싶은 부분을 몇 군데 보여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사이렌오더 닉네임은 평범하다. 나무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한 닉네임이어도 비슷한 시간대에 닉네임을 몇 달씩 부르다 보면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사이렌오더로 주문 후 텀블러를 전달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나무 고객님이시죠?” 하고 카운터 안의 파트너가 먼저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때 ‘아, 닉네임을 바꿀 때가 됐구나’ 생각했다. 닉네임 나무로 사이렌오더가 들어와서 ‘나무지?’ 했을 텐데, 도둑은 항상 제 발이 저린 법. 그 뒤로 닉네임을 바꾸었다. ‘트리’로.

인생은 거기서 거기죠.

스벅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휴대폰 뒤적거리는 시간이 많아지면 슬슬 집에 가고 싶어졌다는 몸의 신호다. 딱 그런 신호가 왔을 즈음, 당근마켓 커뮤니티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에어팟을 분실했다는 글인데, 읽자마자 빵 터졌다.

‘○○역 7번 출구 쪽 버스 정류장에서 에어팟을 잃어버렸습니다. 음악이 없으면 저는 숨 쉬는 원숭이입니다. 에어팟 보신 분, 꼭 연락해주세요.’

아, 웃기고 불쌍해. 이 숨 쉬는 원숭이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도록 도와주고 싶다. 마침 집에 가고 싶던 참인데 한번 찾으러 가보자. 나는 1번 출구 쪽이어서 좀 귀찮긴 하지만. 늦게 가면 없어질까봐 노트북을 가방에 쑤셔 넣고 빛의 속도로 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슬로모션이라는 거 안다.

그가 에어팟을 잃어버렸다는 7번 출구 쪽 버스 정류장 주변으로 가서 구석구석 찾아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같이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또 너무 웃긴다. 그러나 가장 웃긴 건 스벅에서 일하다 당근 글 보고 에어팟 찾으러 튀어나온 너 아니겠어요. (…) 에어팟을 찾아서 “제가 찾았어요, 숨 쉬는 원숭이님, 이제 사람으로 돌아오세요” 하고 댓글을 달아주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다이소 이어폰이라도 사서 임시 호흡하기를.

“아, 저보다 적으시네요. 제가 동안이어서 어려 보이긴 하는데 이래 봬도 마흔두 살입니다.”

오, 신선하다. 동안 부심 있는 남성은 처음 봤다.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도 처음 봤다. 마흔서너 살로 보이는데.

그러나 동안 부심 가진 분을 저격하기에는 좀 찔린다. 나도 한때 동안 부심이 있었다. 근거 없는 동안 부심은 아니었다. 부친, 모친 모두 실제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분들이었다. 일단 부모님은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엄마의 이마는 와상환자인 지금도 팽팽하다. 그 감사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이 “동안이시네요” 칭찬하면 본인은 “아니옵니다” 하고 겸손을 떠는 게 정상이다. 그래야 주고받는 덕담으로 훈훈하게 지나가는데, 본인도 동안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역겨워진다.

철없던 시절(근래까지도 철이 없었다)의 나는 “정말 동안이세요”라고 하면 “그쵸”라고 대답했다. 역겨워서 한 대 치고 싶었을 것 같다. 안 맞고 산 게 용하다. 요즘은 “동안이세요”라고 하면, “아니에요. 엄마 간병으로 고생해서 몇 달 사이에 폭삭 늙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도 재수 없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폭삭 늙은 얼굴에 주름 하나 없으면 주름 있는 나보다 어린 상대방은 어쩌란 것인가.

 

감정 소모 없이 마음 편하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산뜻한 글을 찾는다면 이 에세이가 딱이다. 종종 저자가 번역한 일본 문학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몰라도 전혀 상관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부담도 없다. 재미있게 쭉쭉 읽히니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앉은 자리에서 호로록 커피 마시듯 끝내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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