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Jenny Lee, <Anna K: A Love Story>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를 현대 미국 10대 청소년들의 러브 스토리로 각색한 청소년 소설. 특이점이 있다면 원작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오블론스키 공작(스티바,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에 해당하는 두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설정이다. 사실 나도 이 점에 흥미를 느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거지만.
일단 <안나 카레니나>에 해당하는 인물의 이름과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 <Anna K> 내 캐릭터 이름이고, 그 다음에 ‘/’ 이후에 나오는 이름이 그에 해당하는 원작 인물의 이름이다.
<Anna K: A Love Story>에서도 원작 인물들과 이름은 대략 비슷하다. 안나와 스티븐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아마도 김 씨?), 극 중에 이에 대한 언급도 종종 등장한다. 잘나가는 한국계 미국인 사업가의 아들딸이라 옷에 몇백 달러 쓰는 것 정도는 껌값인 집안이고, 그 점은 스티븐의 여자 친구(원작이라면 오블론스키의 아내인 돌리)인 롤리(참고로 백인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오블론스키가 그랬듯이 스티븐도 롤리를 두고 바람을 피워서 롤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나니까 동생 안나를 보내 롤리를 설득하게 하는데, 안나가 그러려고 오는 길에 (둘이 다른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안나가 기차를 타고 스티븐이 있는 곳까지 옴) 우연히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다. 브론스키는 러시아계 미국인인데, 잘생기고 건드린 여자애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해서 백작(Count)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설정이다. 당연히 원작의 흐름대로, 안나는 남자 친구 알렉산더를 두고도 브론스키에게 끌리게 된다. 롤리의 동생 키미는 아이스 스케이팅을 하다가 부상으로 관뒀고, 스티븐이 연 새해 축하 파티에서 더스틴을 만난다. 더스틴은 똑똑하지만 숫기는 없는 소년인데, 유대계 흑인 남자애다. 니콜라스라는 약물 중독자 형이 있다(이 형 이야기도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쨌거나 더스틴은 키미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데, 키미는 역시나 원작대로 처음에는 브론스키에게 끌린다. 이 정도 말했으면 대충 요약은 된 듯.
이야기는 대체로 원작을 따라가지만 물론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다. 그렇게 똑같은 걸 보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고, 주인공들이 미국의 (대체로 부유한) 십 대 애들이다 보니까 어른들처럼 행동하지도 못한다. 다만 아무래도 그 점 때문에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이 주는 불쾌감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원작은 아무래도 유부녀가 바람이 난 거다 보니까 불륜이고 그래서 나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는데, 여긴 십 대들이다 보니까 뭐, 다른 남자애에게 끌려도 그럴 수도 있지, 싶다. 원래 사귀는 대상이 있는데 다른 상대에게 끌리고 스캔들을 일으킨 게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혼한 것도 아니고 십 대니까 그때엔 그렇게 다양하게 경험해 볼 수도 있지, 하는 느낌. 잘못은 맞지만 죄악까지는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아무래도 십 대들 버전이다 보니까 알렉산더(=카레닌)와 안나 사이에 아이는 당연히 없고, 대신 알렉산더의 여동생 엘레노어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안나랑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타입이라서 안나가 엘레노어를 싫어하는데, 그래도 남친 여동생이라 확 티는 못 내고 짜증만 나게 하는 대상이랄까.
대체적으로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원작 <안나 카레니나>의 양이 방대하다 보니까 이 책도 덩달아서 길어졌다. 종이책 기준으로 400쪽이라고 하는데, 내가 이북 리더로 읽을 때는 글씨 크기 설정에 따라 거의 500쪽에 가까웠다(460쪽 정도). 길이만으로도 좀 압도당하는 면이 있는 데다가, 이 책을 읽는 데 편한 이북 리더를 찾을 때까지는 한번에 많이 읽지도 못해서 이 책을 끝내는 데 다섯 달이나 걸렸다. 물론 중간에 완전히 잊고 방치해 두었던 시간까지 포함해서 그렇다는 거다. 진짜 진심으로 꾸준히 읽은 건 지난 한 달가량인 듯. 여담이지만 구글 플레이 북스도 훌륭한 이북 리더다. 내가 가진 파일을 내 서재에 업로드해서, 어떤 기기에서든 다 동기화해서 읽을 수 있고, 하이라이트와 메모 남기기도 물론 가능하다. 오오, 구글 플레이 북스 최고!
이 책의 단점이랄까 부족한 점을 몇 가지 찾자면, 일단 때로 ‘보그체’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브랜드명을 묘사로 칠 수 있나? 예를 들어서 롤리가 ‘라벤더색 모니크 륄리에 드레스를 입었다’ 같은 문장. 라벤더색이라는 묘사는 분명히 독자로 하여금 롤리가 입은 옷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모니크 륄리에가 디자이너 이름이라는 것 말고 우리에게 주는 정보값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패션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이 말만 듣고도 대충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겠구나 하고 감이 올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그냥 ‘라벤더색 비싼 드레스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 그친다. 브랜드명은 적절한 묘사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내내 했다. 그리고 안나가 아무리 책의 타이틀 롤을 맡은 주인공이로서니, 키미의 분량이 좀 부족한 느낌이다. 더스틴과 키미가 사귀기 전까지는 키미도 분명히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었고, 성장도 했는데, 둘이 사귀게 된 이후로 키미는 정말 눈곱만큼 나온다. 오히려 그 이후로 더스틴이 안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런저런 식으로 위로도 하면서 말을 하는데, 키미는 완전 뒷전. 둘이 사귀게 만들어 놨으니 키미의 내러티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건지.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총 네 커플이 등장하는데(스티바-돌리, 카레닌-안나, 안나-브론스키, 레빈-키티), 그중에서 저자 톨스토이가 제일 이상적이고 훌륭한 커플의 본보기라고 생각했던 게 레빈과 키티의 관계 아닌가. 그러면 키티(=키미)도 분명 중요한 인물인데 왜 후반에서는 대접이 이런지 너무 아쉽다.
또한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더스틴이 똑똑한데 숫기가 없는 소년이라는 캐릭터성을 나타내는 데 있어 후자는 잘된 것 같지만 전자는 잘 모르겠다. 작가가 얘한테 ‘독특한 점(quirk)’으로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안다는 특징을 부여했는데, 그 점을 드러낼 때 언급하는 영화가 내가 보기엔 전부 유명하고 이미 잘 알려진 영화다. <이터널 선샤인>이나 <히트>,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 같은 거. 미안하다, 할매는 이미 그 영화들 다 알아… 십 대들에게는 그 영화들이 ‘올드’한 클래식으로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 아는 얼굴들이라… 흑흑 🥲 그래, 십 대, 그것도 십대 초반들 기준으로는 그것도 충분히 ‘마니악’하게 느껴질 수 있지. 그건 그렇다 치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안나가 아무리 바람을 피웠기로서니, 아직 십 대이고 어린데 그게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어서 헤픈 여자애 취급받는 엔딩을 맞이할 정도로 나쁜 짓이냐,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진짜 불륜을 한 어른이라면, 유부녀라면 그래도 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얘는 이제 17살인데! 극 중에서도 아직 안나가 17살밖에 안 됐기 때문에 안나의 섹스 비디오(물론 유출당한 것)의 유통은 아동 포르노로 취급되어, FBI가 이 사건을 맡았다고 돼 있다. 십 대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벌 아니냐며… 십 대의 바람이 성인의 불륜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받아야 할 짓은 아니지 않나? 너무해 😥 위에서 말했듯이, 그게 잘못일지언정 죄악까지는 아닌데. 그리고 범인도… 솔직히 걔가 무슨 수로 안나와 브론스키가 관계하는 걸 찍었다는 건지, 좀 억지스럽다.
어쨌거나, 청소년 소설치고 400쪽이라는 좀 긴 분량을 감안하고, 이를 견딜 수 있다 한다면 나쁘지 않은 소설이다. 나야 워낙에 원작을 새롭게 상상해서 쓴 ‘리라이팅(re-writing)’류를 좋아해서 잘 읽었고, 앞으로도 또 이런 걸 찾아서 읽을 예정이지만, 그래도 이거 후속작인 <Anna K Away>까지는 안 읽을 것 같다. 이건 안나 K.가 브론스키의 죽음(여기에서는 원작과 달리 안나가 아니라 브론스키가 죽는다)과 섹스 비디오의 여파 때문에 마음도 추스르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를 새로운 곳, 즉 한국에서 학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다뤘다는데, 나는 딱히 이 후속작은 안 끌린다. <Anna K: A Love Story>가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도 있었는데 그게 무려 2019년이다. 그 이후로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니 엎어진 듯. 그건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어쨌거나 관심 있는 분이라면, 영어 400쪽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는 분이라면 시도해 보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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