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내가 사랑하는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 시간상으로 따지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보다 이전에 나왔다. 이 소설은 하원의원 에런 레빈과 사랑에 빠져 스캔들이 난 젊은 인턴 아비바 그로스먼을 중심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레이철(아비바의 엄마), 루비(아비바의 딸), 엠베스(레빈의 아내), 그리고 아비바/제인 본인 이렇게 네 명의 여성의 관점으로 들려준다.
방금 요약했듯,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비바와 레빈의 스캔들이다. 아비바는 정치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싶었고, 엄마 레이철의 연줄을 이용해 같은 시의 하원의원인 레빈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 무급 인턴이라 딱히 엄청 큰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레빈과 직접 만나게 되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레빈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레빈은 유부남이었다. 레빈은 아내인 엠베스와는 정략 결혼을 한 것이며, 아비바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결혼 생활은 망했다고 말한다. 유부남들이 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들. 어쨌든 예상치도 못한 일로(한 할머니가 레빈의 차 옆구리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냈는데 그때 마침 레빈의 옆에 아비바가 차에 타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까발려지게 되었고, 아비바는 모니카 르윈스키에 비교될 정도로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된다.
아비바의 엄마 레이철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 후에) 아비바의 스캔들을 언급한 남자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비바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요? 누군가의 딸자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요? 레빈은 성인 남자이자 선출직 공무원이고 내 딸은 사랑에 빠진 철부지였는데, 레빈은 결국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내 딸만 두고두고 회자되는군. 뭐야,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그애가 또다른 꼰대의 농담거리가 돼야 하는 거지?”
사실 젊은 시절에 거지 같은 연애 한 번쯤은 다들 해 보는 것 아닌가. 나도 아비바처럼 처참한 실수를 해 봤다. 아비바와 나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정말 천만다행히도 내 연애 상대는 레빈만큼 알려진 공인이 아니었기에 이 모든 과정을 그냥 내 개인의 흑역사로 묻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뿐이다. 나도 아비바만큼이나 젊고 멍청했었는데. 솔직히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인 여성들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선입견을 가지고 봤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단순히 젊고 부주의했기에 그랬을 뿐이고, 그 일이 일어난 후 많이 성장하고 변하지 않았을까? 내 거지 같은 연애로 인해 나도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이전과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게 된 것처럼. 누군가 나의 그 젊은 시절 실수를 알고 내가 여전히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모욕당한 느낌이 들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아비바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저자가 아비바/제인의 시점뿐 아니라 엠베스, 그러니까 레빈의 아내 입장까지 보여 준 게 정말 좋았다. 아비바가 레빈을 빼앗으려 한 섹스에 미친 악녀가 아니듯, 엠베스도 질투에 눈이 돈 악처가 아니다. 그보다 더욱 입체적인 인물이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는 여인이다.
잿빛 머리 여자가 물었다. “얘기하시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대단히 지적이시네요. 언제 선거에 나오실 예정인가요? 한 집안에 정치인이 두 명 있으면 안 됩니까?”
엠베스는 대중 상대용 웃음을 터뜨렸다. 속으로 혼자만의 농담을 했다. ‘이 집안에는 이미 정치인이 두 명 있을지도 모르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면 그 질문이 찬사로 들렸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녀도 그런 야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부 다 하얗게 불태워버렸다. 그녀는 에런을 팍팍 밀어놓고는 그가 진짜로 성공하자 분했다. 하지만 정치인의 아내로서 그녀는 정치를 실컷 누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치에서 정치인의 아내보다 나쁜 직업은 없었다. 문자 그대로, 그보다 더 대우 나쁘고—그야말로 땡전 한 푼 안 준다—요구 많은 직업이 없었다. 아비바게이트가 한창일 때, 엠베스는 인신매매에 관한 여성 정치인 토론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 사람이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질문을 스크린에 띄웠다. (1)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가? (2) 혼자 있는 시간이 전혀 없는가? (3)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질문에 대신 대답하는가? (4)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는가? 기타 등등. 자신의 대답에 비추어봤을 때, 엠베스는 자신이 인신매매의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
“저는 힐러리 클린턴이 아닙니다.” 엠베스는 청중을 향해 말했다. “선거를 또 감당할 자신이 없네요. 방방곡곡 돌아다니고 싶은 욕심도 없고요. 요즘 제 관심사는 집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클린턴에게 투표할 거예요. 달리 뽑을 사람이 있나요?”
엠베스는 레빈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레빈을 끔찍이 사랑하는 ‘남미새’인 것은 맞지만(아니, 근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가 있지?) 동시에 엠베스는 루비에게 ‘돌직구 같은 매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여인이다. 따지고 보면 루비와 엠베스는 서로 대립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사실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고 엠베스는 루비에게 비밀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인간은 원래 상반되는 여러 가지 면이 있으니까.
다소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심각해하지 않는다. 아비바가 괴로운 시간을 보낸 것은 맞지만 그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전체적인 톤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나는 특히 아비바/제인의 딸 루비가 특히 귀엽고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들.
“루비, 굉장한 이름이구나.” 웨스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평생을 그 이름으로 살았지요.” 루비가 말했다.
사무실 전화를 받는다. 나는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아서 아무도 내가 열세 살인 줄 몰라.
엄마는 :( 표정이 됐어. 난 엄마의 저 표정을 안 보려고 제법 애쓰며 살아왔는데.
내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추천했듯 이 소설도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도 개브리얼 제빈 소설들 계속 읽을 듯. 일단 <섬에 있는 서점>이 남아 있으니 다음엔 이걸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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