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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Sierra Greer, <Annie Bot>

by Jaime Chung 202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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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Sierra Greer, <Annie Bot>

 

SF 소설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이 보자마자 탈락시킨다는 소재가 있다. 바로 ‘섹스 로봇’이다(출처). 배명훈 작가는 “특별히 역할이 있거나 내용상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그냥 익숙한 미래의 풍경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 로봇 이야기를 집어넣은 글이 예심 기간 읽은 응모작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읽고선 소설을 쓴다는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상상력이 빈약한지, 미래니까 성욕을 처리해 줄 ‘여성형’ 로봇은 반드시 있겠거니 생각하고 그걸 소설에 집어넣는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이 소설은 바로 그 흔하디 흔한 여성형 섹스 로봇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다시 한 번 배명훈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보자. “’로봇은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원칙과 ‘여성형 섹스 로봇’이 결합할 경우,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게 될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보시기 바란다.” 미국 소설가 시에라 그리어의 데뷔 소설인 <애니 봇>은 여성 혐오에 빠진 남자에게 통제당하는 여성이 겪을 법한 일들을 ‘애니’라는 이름의 섹스 로봇의 처지에 비유해 보여 준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이 소설은 현실 도피용이 아니다. 어떤 소설은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상상의 장소를 제공하곤 하는데, 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잘 옮긴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다.

일단 기본 설정부터 보자면 이렇다. 소설 속 세상은 우리가 사는 현대와 비슷하지만 로봇이 흔한 근미래이다. ‘스텔라-핸디’라는 기업에서는 여성형 ‘스텔라’와 남성형 ‘핸디’라는 이름의 AI 로봇을 판다. 백인 남자 더그는 흑인 여자인 그웬과 이혼한 후, 그웬과 비슷하게 커스터마이징을 한 스텔라를 사서 데려와 애니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원래 스텔라에게는 집안일에 최적화된 ‘애비게일’ 모드와 아이 돌보기 전담인 ‘내니’ 모드, 그리고 섹스용인 ‘커들 버니(cuddle bunny, 아이들이 토끼 인형을 꼭 껴안고 자듯이 애정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 모드가 있다. 애니는 원래 애비게일 모드였지만 커들 버니 모드로 전환됐고, ‘독학(autodidactic)’ 모드도 켜져서 주변 환경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애니는 주인인 더그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데, 현재 그의 분노가 10점 만점에 2점이라는 식으로 기분을 파악한다.

소설이 시작할 때 애니는 이미 더그에게 구입되어 한동안 ‘커들 버니’이자 ‘독학’ 모드로 생활해 온 상태다. 어느 날, 더그의 친구인 롤랜드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오랜만에 더그를 보기 위해 더그네 집에 찾아온다. 롤랜드는 낯선 미인 애니를 보고 놀라지만 곧 그녀가 섹스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그는 애니를 자랑하고, 롤랜드와 회포를 풀다가 시간이 늦어지자 롤랜드를 자기 집에서 자고 가게 해 준다. 그날 밤, 롤랜드는 애니에게 더그에게는 거짓말하면 되지 않냐며, ‘비밀’이 그녀를 진짜로 만들어 줄 것이라며 자신과 섹스하자며 유혹한다. ‘독학’ 모드를 통해 입력되지 않은 사실도 스스로 배워나갈 수 있는 애니는 인간처럼 된다는 말에 끌려 고민하고, 이 사이에 롤랜드는 그녀의 명확한 동의 없이 그녀를 성폭행한다. 이것이 앞으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인셀 찐따라는 본색을 숨길 수 없는 더그로 하여금 애니를 괴롭히는 이유가 된다.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애니가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하고 또 소설이 진행될수록 애니가 정말로 (후에 더그와 애니를 상담해 주는 상담가 모니카의 말대로) ‘인간다운’ 자질을 가지고 있고 또 그걸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때 애니는 상대적으로 순진했고 뭘 몰랐기에 롤랜드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더그는 애니가 롤랜드와 ‘잤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미성년자가 성인과 (능동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주체적으로) ‘잤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틀린 말이다. 미성년자가 분명하게 사리분별이 된다면 의제 강간이라는 게 왜 법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애니는 섹스 로봇이고, 섹스의 대상으로 누굴 선호하고 말고 할 취향이나 능력이 없다. 애초에 애니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더그 따위와 안 잤겠지…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더그는 애니가 롤랜드랑 잤으니 자기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애니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며 분노하고 애니를 괴롭힌다. 이 괴롭히는 방식도 정말 찌질한 인셀 새끼다운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제일 역겹고 괴로웠다. 나한테는 약간 트라우마로 남은 듯… 이 부분은 굳이 스포일러 하지 않겠다. 말하려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으니까.

어쨌거나 애니는 롤랜드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본인은 그런 자각이 없지만), 더그는 애니를 롤랜드의 결혼식에 데려가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급격히 바꾼다. 애니에게 집안일 좀 잘하라고 집안일을 잔뜩 시키고서는 안 되겠다며 ‘델타’라는 이름의 집안일 전용 여성형 로봇을 하나 더 들이기도 한다. 그래 놓고 또 델타랑도 섹스. 애니는 이때 질투를 느끼는데 읽는 내가 너무 괴로웠다. 사실 이 소설 자체가 괴로웠다. 상대에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가스라이팅을 심하게 당한 (인간) 여자의 감정과 정신 상태를 보는 것 같아서. 더그의 눈치를 계속 보고, ‘인간다운’ 자질을 키워 나가는 와중에도, 심지어 더그에게서 (델타랑 같이) 도망가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도 더그를 상대로 ‘분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애니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애니가 진짜로 분노하는 것은 소설의 극후반, 애니가 진짜로 자유로워졌을 때이다. 그때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도피를 시도했던 애니는 다시 더그네 집으로 끌려오고, 몇달 간 전원이 나갔다가 다시 켜진다. 더그는 사실 ‘독학’모드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애니의 CIU(Central Intelligence Unit, 중앙 지능 장치)를 복제해서 다른 AI 로봇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스텔라-핸디사와 맺었다. 그래서 상당히 큰돈을 받았는데도 그 짓을 한 것이다(여기에서 더그 자식이 여자를 이용해 돈을 벌어먹는 포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가 몇 달 후, 더그는 반성을 했는지 다시 잘해 보자며 애니의 전원을 켜고,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를 중점으로 하는 상담가 모니카에게 데려가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더그는 보통 ‘남미새’라면 많이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예컨대 애니가 더그 없이 스스로 근처 공원 등을 돌아보고 오게 ‘훈련’시키는 것이나 애니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에 데려다주는 것 등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더그는 애니에게 아이를 가지고 싶고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애니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바라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더그를 아버지로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애니는 일단 충격을 숨기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척하는데, 더그는 애니를 위해 만들었다며 진짜 신분증을 주면서 ‘애니 봇’이라는 절대 명령어를 사용해 애니의 위치 트래킹 기능을 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애니 봇’ 명령어를 이용해 애니에게 자유를 준다. 그때 애니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 퓨즈가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이제야 정말로 자유가 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애니는 기쁨을 간신히 숨기고, 그가 섹스를 한 후 그가 곯아떨어진 사이에 집을 떠난다.

이것이 소설의 끝인데 솔직히 내가 바랐던 만큼 막 환희가 넘치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애니가 자유를 더욱 강렬히 갈망하고 더그에게 저항해서 차라리 더그 뚝배기를 깨고 달아났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하고 메모를 남겼는데 아마 그걸 통계를 낸다면 가장 많이 쓴 말이 ‘더그 새끼’, ‘인셀’, ‘역겨워’, 그리고 ‘뒤져라’일 것이다. 그만큼 더그로 대표되는 인셀 찌질남, 여성 혐오남의 모습을 저자가 끔찍할 정도로 잘 그려냈다. 그런 놈들은 소설 후반에 더그가 그러듯이 변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줘도 본색은 숨길 수 없다. 더그를 보면 ‘좋은 노예 주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좋은 노예 주인이라는 게 합당하기나 한 말인가? 노예 주인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노예를 좀 살만하게 굴리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전부 해방시켜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줘야 하지 않나? 자신이 비록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지언정,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나? 아니, 인지는 하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을 놓기 싫으니까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건가? 여성을 자기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해 주지 않는 남자는, 아무리 잘해 봐야 ‘좋은 노예 주인’에 불과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 또 하나. 현재 우리나라 여자들(그리고 또 외국에서도)이 하고 있는 ‘4비(非) 운동(남자와 연애하지 않기, 섹스하지 않기, 결혼하지 않기, 애 낳아 주지 않기)’만큼 효과 있는 건 없다는 거. 애니가 더그 새끼랑 섹스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자가 야설처럼 섹스를 길고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답답했다. 왜 이런 놈이랑 자 주지? 뭐가 좋다고? 더그 같은 새끼가 파트너를 배려하는, 사랑이 담긴 섹스를 할 리가 없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솔직히 애니가 더그를 섹스를 해 주는 건 애니가 딱 그 용도로 만들어진 로봇이기 때문이고, 그거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극 중 묘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설정인즉, 남성기가 삽입되어야만 애니는 절정을 맞을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 인간 여자가 이럴 리는 전무하다. 남자 없이도 여성이 쾌락을 느낄 방법은 많은데요. 이거야말로 정말 소설이고 로봇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아, 더그 같은 소유주가 애니 같은 로봇의 성욕 레벨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 1에서 10까지 설정할 수 있는데, 더그는 초반에 애니의 성욕을 4에다 설정했다. 보아 하니 여자가 너무 성욕이 강해서 자기가 만족시켜 줄 수 없을 것 같으면 공포를 느끼는 그런 류의 남자인가 보지. 안 봐도 뻔하지.

앞에서 애니가 더그에게 학대당하는 관계에 있는 것 같다고 썼는데, ‘학대’까지는 아니어도 여자들에게 자기가 바라는 것이나 자기 편의를 희생해 가며 남자를 기쁘게 해 주려고 애쓴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솔직히 많은 여자들이 그렇다고 말할 것 같다. 연애하면서 이런 감정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않은 여자가 몇이나 될까? 여자들은 자신이 바라는 게 중요하지 않으며 타인, 특히 남자들에게 친절하고 온순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컸다. 그러니 자신이 분명하게 부당한 상황에 처하거나 피해를 입어도 곧장 그에 분노하거나 저항하기를 꺼리고 스스로를 검열한다. 상대를 만족시키려는 마음과, ‘좋은’,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여자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애니가 더그에게서 ‘애니 봇’이라는 강제 명령어를 이용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을 받은 이후에야 진짜로 자유로워지고, 그 전까지 자신의 종속된 상황에 대해서 진정으로 분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현실적이고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지만 확실히 최소 딱 한 번은 읽어 볼 만한 소설이다. 이게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및 출간되면 좋겠다. 앞에서 말했듯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더욱 똑바로 바라보게 해 줄 그런 소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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