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레이첼 E. 그로스, <버자이너>
이 책의 저자는 세균성 질염으로 고생하다가, 딱히 치료 방법이 없다는 말에 정말 마지막 수단으로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엄밀히 말하면 쥐약”인 붕산을 질정으로 삽입했다. 열흘간 꼬박꼬박 처방을 따르던 어느 날,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쯤 덜 깬 채로 화장실에 가서 질에 넣어야 할 붕산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넣어 버렸다! 다행히 위세척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고 저자는 무사했다. 이 일은 저자로 하여금 “내 생식기에 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였고, 이는 또한 “이 책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버자이너(vagina)’는 여성 생식기나 질을 뜻한다. 당연히 책의 초점도 여성 생식기에 맞추어져 있다. 남성의 생식기에 비해 많이 연구되지 않아 아직 적절한 용어와 표현이 없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성 생식기에 대해 알려진 것을 그러모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책을 읽다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단연코 “내 몸에 대해 이렇게 아는 게 없었구나” 하는 것이다. 이 점에는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느낀 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남자들을 위해 희생하느라 자기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여성의 역사는 시간 또는 인류의 역사와 비슷하게 길다는 것. 그 좋은 예 중 하나가 프로이트의 아내인 마르타 베르나이스다. 베르나이스는 “프로이트보다도 수준이 높은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사람들의 입과 글에 부지런히 오르내려도 베르나이스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베르나이스는 1886년에 프로이트와 결혼한 후부터 9년간 여섯 명의 아이를 낳느라 거의 계속 임신 상태였다. 결혼 전에 받았던 장문의 연애편지는 세탁할 옷들을 적은 목록으로 바뀌었다. 프로이트가 자기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던 건 베르나이스의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베르나이스는 가정을 돌보며 아이들을 키우고 수요일 저녁이면 자신의 집 거실에 모여드는 정신분석학계의 거장들을 접대했다. 매주 모임이 있는 날이면 베르나이스는 손님들에게 블랙커피와 시가를 대접했는데, 프로이트는 아내의 접대가 끝난 후에야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난 후 베르나이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53년의 결혼생활 동안 서로에게 화내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주 작은 위안이 된다. 남편이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일상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최대한 떨치려고 늘 노력했다.”
베르나이스의 뒷바라지를 이렇게 받아 놓고도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남근 선망’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여성의 성적 발달이, 처음에는 생식기 부위의 중심이 음핵이었다가 나중에는 질로 바뀌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같은 글을 썼다는 게 어이가 없다. 이런 헛소리를 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남녀 포함)은 또 뭔데!?
프로이트 자신이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개인적으로 의지한 권위자는 따로 있었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보면 그가 마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지난 30년간 여성의 영혼을 연구했지만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중대한 질문에 나는 여전히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이 남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진짜 할 말이 없다…
남자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한 사례는 또 있다. 미리엄 멘킨은 체외수정 연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데, 보스턴 브루클린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을 위한 ‘여성무료병원’에서 불임클리닉을 책임지던 존 록 박사의 아래에서 일했다. 그녀는 세계 최초로 체외수정을 성공시켰고 생식세포를 연구했다. 그러나 일뿐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일도 도맡아 하며 바쁘게 살던 그녀의 연구는 갑작스럽게 중단되어야 했다. 남편이 기존에 일하던 곳에서 실직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학위는 없을지언정 생식 기능에 관한 지식을 더욱 넓혀줄 과학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때 미리엄도, 록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미리엄의 남편이 실직한 것이다. 미리엄과 연구를 계속하기를 바란 록은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찾아가 밸리를 해고하지 말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십 년 후 미리엄은 록의 전기를 쓰던 기자에게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정말 너무 슬펐습니다.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일이었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다 포기해야 한다니…….” 미리엄은 연구와 점점 멀어졌다. 밸리의 새로운 직장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듀크대학교였고 그의 아내이자 그와 낳은 자식들의 어머니인 미리엄은 그를 따라가야 했다. 그곳에서 체외수정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한 의사는 “체외 강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리엄은 남편이 새 일자리를 찾는 곳마다 자신도 체외수정 연구를 계속할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몇 년 후, 그녀는 마침내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고 딸 루시의 양육권을 확보해 보스턴으로 돌아와 록 박사 밑에서 다시 일할 수 있었다. 다행…
두 번째로 느낀 점은 다윈도 참 답 없는 여성 혐오자였다는 것. 이런 자식을 위인이라고 추어올리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아래 인용문에서 언급된 코이코이족 여성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설명은 헤더 라드케의 <엉덩이즘>을 참고하면 좋다.
다윈은 책에서 생식기에 대한 언급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왜 원숭이와 코이코이족 여성의 외음부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였을까?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애머스트의 매사추세츠대학교에서 여성, 사회적 성, 성적 특성 분야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다윈 괴담: 변이의 과학과 다양성의 정치학Ghost Stories for Darwin: The Science of Variation and the Politics of Diversity》(2014)의 저자 바누 수브라마니암Banu Subramaniam의 말이다. 다윈의 눈에 원숭이와 코이코이족 여성은 유럽의 세련된 백인 여성으로 진화하기 전 인류의 원시 조상, 어쩌면 인간 이전의 동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해부학적 성을 설명하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올바른 여성을 기준으로 한 해부학적 성을 이야기할 때처럼 위험한 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서열을 나누던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남부 지역 여성의 성적 특성은 두개골 크기나 피부색과 더불어 서열상 최하위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졌다. 제국주의 원칙이 여전히 잔존하는 나라에서는 참으로 편리한 개념이었다. “성과 인종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수브라마니암의 설명이다. “성은 항상 인종에 따라 나뉘었고, 인종은 성별에 따라 구분됐어요. 흑인 여성을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한 이미지 속에는 우리의 이런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학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오늘날의 인종주의는 노예제도가 남긴 유해한 유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뿐이 아니다.
다윈은 피임도 강력히 반대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학식 있는 여성이 피임을 할 수 있게 되면 가난하고 핍박받는 대중, 즉 열등하고 ‘무모한’ 사람들에게 금세 따라잡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윈은 “가족의 유대는 여성의 순결에 달려 있는데, 미혼 여성들 사이에 피임법이 퍼지면 순결을 잃는 여성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러면 가족의 유대도 약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이런 생각을 굳게 실천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내 에마(Emma Darwin)는 총 열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일곱 명이 성인으로 자랐다.
다윈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동물을 보는 관점의 직접적인 소산이었고, 그 두 가지는 서로를 보강했다. 그는 과학자로 활동하는 내내 모든 동물의 암컷은 수컷보다 능력도, 지능도 떨어진다는 관점을 고수했다.26 그리고 거의 모든 종의 “수컷은 경쟁자들과 맞붙어 싸우며 암컷 앞에서 정성스레 자신의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하여 경쟁에서 승리한 수컷은 자손에게 자신의 우월한 형질을 물려준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체로 수컷이 암컷보다 ‘강하고 사나운’ 이유, 공작의 멋진 꼬리 같은 극히 정교한 형질이 수컷에게 발달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의 이런 논리는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남성은 궁극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위로라도 하듯 “아름다움은 여성이 낫다”라고 했다.
이 외에도 다윈의 여성 혐오적인 면이 더 많이 있지만 이제 그만 알아보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니까…
여성 생식기에 관한 책이지만 이 세상이 여성 혐오에 기반하고 있기에 여성과 여성 생식기가 무시받고 인정받지 못한 역사가 이군데군데 드러나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이제라도 더욱더 여성과 여성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더 연구하며 나아가는 수밖에(음핵의 해부학적 구조를 해부와 MRI 영상 등으로 자세히 밝혀낸 호주 비뇨기과 전문의 오코넬의 논문이 발행된 게 2005년이니 우리가 음핵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인 셈이다). 저자가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노력한 것은 맞지만 서양의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 볼 만하고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여성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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