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박신영, <역사 즐기는 법>
제목부터 굉장하다. 역사를 읽거나 배우는 법도 아니고 ‘즐기는’ 방법이라니. 저자는 소문난 ‘역사 덕후’로서, 전공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언니를 보라>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거침없이 우아하게 젠더살롱> 등의 역사 에세이를 써 왔다. 이 책은 그런 그가 소개하는, 역사를 ‘즐기는’ 방법이다.
내 올해 독서 목표 중 하나가 역사 관련 도서를 읽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주제 자체가 내게는 어렵게 느껴지다 보니 여러 번 시도를 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이걸로 챌린지 완수!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역사를 사랑하는 저자를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역사도 즐길 수 있는 것이구나! 저자는 일단 궁금한 것에서 시작하자고 말한다. 관심이 있는 분야의 역사부터 시작하면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흥망성쇠와 왕조사, 전쟁사만 역사인 것은 아닙니다. 왕과 전쟁 영웅, 권력자, 남성만 한 시대를 힘껏 살아간 것도 아닙니다. ‘역사’라고 생각하면 대개 떠올리곤 하는 기본적인 ‘통사’ 외에 생활사, 문화사, 미시사 쪽으로 흥미롭게 읽을 만한 역사책도 많이 있어요. 분명히 있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분야가, 읽다가 도중에 덮지 않을 역사책이.
딱딱한 역사 교과서에서 받은 첫인상 때문에 역사책 읽을 생각이 안 드시나요? 어려운 고전 명저에 도전했다가 상처만 받고 포기하셨나요? 포기의 경험이 쌓여서 이제는 어떤 책을 고를지 막막하신가요? 즐겁게 읽고 싶으니 지루한 책은 피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평소 관심 있는 대상을 하나 떠올려 보아요. 커피, 맥주, 도자기, 해적, 야구,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시대, 특정 인물… 다 좋습니다. 다음으로, 떠올린 대상 뒤에 ‘역사’를 붙여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넣어 보세요. ‘커피의 역사’나 ‘맥주의 역사’ ‘도자기의 역사’ ‘해적의 역사’… 드라마나 영화라면 그 배경이 되는 시대를 검색해 보세요. 삼국시대, 개화기, 프랑스혁명… 흥미로운 책 이름이 주루룩 나올 겁니다.
또한 역사서 읽기 초보라면 세계사 통사, 큰 범위의 지역사를 거쳐 각국사 순서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면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과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도 대략 파악할 수 있고, 따라서 본격적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한 나라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바탕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각국사’를 읽을 때가. 관심 있는 대상을 다루는 대중적인 역사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역사서 독서에 큰 거부감은 없어질 터이니 본격적으로 각국사를 읽기 딱 좋을 때죠.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앞두고 있다면 처음부터 통사식으로 구성된 한 나라의 역사책을 읽을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잠깐, 역사서 읽기 초보 단계라면, 처음부터 각 나라별로 서술된 역사책을 읽는 것을 저는 권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권 나라라면 더더욱이요.
특별히 관심 있는 나라가 있더라도, 세계사 통사와 큰 범위의 지역사를 읽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각국사를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일 역사가 궁금하더라도 ‘독일사’라고 나온 책부터 덥석 읽지 말고, 세계사를 읽고, 유럽사를 읽고, 그다음에 비로소 독일사를 읽어 보는 거죠. 한 나라의 특정 시대가 궁금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예로 든 『돈가스의 탄생』에서 다룬 시대를 집중적으로 알고 싶다면, 먼저 동아시아사를 읽고 그다음 일본사를 읽고 나서 메이지 시대사를 읽는 겁니다.
저자는 또한 ‘세계관을 뒤집어 주는 책을 읽자’(제주인에게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 장군은 학살자일 수 있다), ‘여성사를 읽자’(농경정주민이 아닌 유목민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아버지나 형제의 처를 아내로 삼는 ‘수계혼’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풍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여성을 재산처럼 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역사가 어떤 계기로 조명되는지 살피며 읽자’(중국은 바다를 통해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원정을 떠났던 정화를 2000년대 이후 다시 위인으로 조명했다) 등, 균형 잡힌 시선에서 역사를 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방법을 일러 준다.
개인적으로 제일 감명 받은 부분은 ‘한국 현대사를 읽자’라는 꼭지였다. 우리나라 가장 근래의 역사에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그걸 알고 또 정확히,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로서나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똑바로 직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6·25 전쟁 같은 큰 사건은 사회뿐 아니라 개인에게 끼친 영향이 있는데, 그걸 개인적 차원에서도 말할 수 있어야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전쟁 이야기를 반복하던 어른들 역시 그랬던 걸까요. 자신이 겪은 사건이 이해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무서웠기 때문에 불이 났던 상황을 계속 말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어떤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의 의식은 시간이 흘러도 그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 멈추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가스통 메고 태극기 휘날리며 시위에 나선 할아버님들은 “니들이 전쟁을 알아? 자유 대한 수호!”를 외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무섭고 힘들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 아닐까요. 자신은 여전히 괴로운데, 자신이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흘러도 납득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요.
사람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내서 계속 말하는 것은 과거 사건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야기를 해서 해석하고 증언해야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6・25 전쟁뿐만 아니라 여순, 4・3, 광주, 세월호, 이태원… 공개적으로 말하고 또 말하는 자리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를 보면, 정부는 말하는 피해자와 유족 들을 지겹다고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빨갱이에 반정부 인사, 불순분자로 몰아 입을 막아 버리곤 했습니다. 참사 생존자들에게 증언할 기회를 마련해 주고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밝혀서 책임자에게 엄중히 죄를 묻고 제대로 처벌해야 트라우마가 치유되고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똑바로 알아야 묵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어리거나 약한 가까운 이들에게 화풀이하면서 관계를 망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책으로 비유하자면 코덱스가 아니라 초기의 책처럼 두루마리 형태로 저장된 것 같습니다. 책을 던져 본다면, 현대의 책처럼 낱장으로 잘려 제본된 코덱스 형태의 책이라면 아무 쪽으로나 펼쳐져서 바닥으로 떨어지겠지요. 반면 두루마리 책은 몇 번을 던져도 두루마리 형태가 풀리면서 맨 첫 부분부터 펼쳐집니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도 충격을 받으면 늘 처음부터 펼쳐집니다. 한 개인의 기억 속에 아픈 과거사가 있다면, 현재가 어느 시점이든 입을 떼면 자신이 강렬한 충격을 받은 그 시절의 맨 처음 이야기부터 풀어 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과거 어느 사건을 일부러 기억해 두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도 아닙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사건이 벌어진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책을 읽고 배우는 일은 각 개인이 직접 해야 할 일이지만, 이 책을 통해 역사에 관한 태도나 시선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준비는 충분히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덕분에 역사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진 듯하다. 저자의 역사 에세이들도 찾아서 읽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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