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 감상/책 추천] 서라미, <아무튼, 뜨개>

by Jaime Chung 2021. 5. 3.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서라미, <아무튼, 뜨개>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다(<아무튼> 시리즈에 관해 쓴 리뷰는 이 포스트 마지막에 붙여 놓겠다. 한두 개면 여기에 놓으려고 했더니 내가 무려 <아무튼> 시리즈의 책을 아홉 권이나 읽고 후기를 썼더라).

사실 나는 뜨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별 관심도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싫어하는 쪽인데(뜨개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뜨개를 했다. 원래 누굴 싫어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게 싫어지는 법이지 않나) 이 책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마지막에는 '아, 이래서 뜨개를 하는구나' 하고 뜨개의 매력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애정의 힘인가?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뜨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주의에 관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하는 책 제목이 무려 <니트는 페미니스트 이슈다>일 정도.

니트가 도대체 여성주의랑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관련이 아주 많다. 왜 이걸 여태까지 몰랐지, 

일단 니트가 여성스러운 취미로 여겨진다는 점부터 생각해 보자.

뜨개를 하면서 내 안의 인지 부조화를 느낀 경험은 또 있다. 뜨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뜨개를 한다는 사실을 안 주변인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네가 그걸 왜 해?" 사람들이 아는 나는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반면, 그들이 아는 뜨개는 퍽 여성스러운 취미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뜨개를 하면서도 뜨개를 해도 되나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에 종종 빠지고는 했는데, 그 이상함의 정체란 내가 성 편견을 굳히는 데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행여 그렇다 해도 뜨개를 멈출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하지만 뜨개를 할수록 궁금했다. 뜨개에는 왜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많을까. 지금까지 해본 어떤 취미도 이토록 자기 분열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뜨개는 어쩌다 여성만 즐기는 취미가 됐을까. 나는 왜 뜨개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할까.

직물사 연구가 페넬로페 헤밍웨이는 <니트는 페미니스트 이슈다>라는 글에서 뜨개의 역사와 여성성에 관해 썼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전에 뜨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방직 공장이 생겨나면서 뜨개는 점차 가정과 공예의 영역으로 밀려났고 끝내 여성의 전유물이 됐다. 그렇게 일부 여서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뜨개는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여성스러운 일로 인식되면서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남자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혹시 여성스러운 일을 하는 여성은 수동적이고 시야가 좁다는 인식에는 남성의 시각이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여성스러움을 열등한 속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남성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와 함께 뜨개 책 읽기 모임을 하는 내 뜨개 친구는 이렇게 일갈했다. 여성스러움을 거부하는 것 또한 여성 혐오일 수 있다고 배웠다고.

뜨개란 단순히 실이나 바늘처럼 성이 없는 무생물을 가지고 인간이 하는 취미일 뿐인데 거기에 여성스러운 일이라거나, 따라서 요조숙녀 같은 여성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위를 붙이는 것은 온전히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어느 한쪽에 기울어져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겠고.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뜨개 하기에 남녀가 따로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공예가 마이크 아스피날에 따르면 중세에 뜨개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특히 사업을 위해 또는 종교의식에 필요한 의복을 만들기 위해 뜨개를 배우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였고, 남자를 위한 직업 뜨개인 양성기관도 있었다. 이 남자 뜨개인 지망생들은 3년간의 혹독한 수습생 시절을 거친 뒤 다시 3년간 유럽 이곳저곳에서 연수를 하며 뜨개 기술을 연마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스타킹, 양말, 모자, 장갑, 코트 심지어 카펫까지 다양한 편물을 뜨는 씨험을 무려 13주 동안 치러야 했다. 6년이 넘게 걸리는 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이 직업 뜨개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직업 뜨개인은 뜨개 길드를 만들어 뜨개 비법을 공유하고 영업 비밀을 엄수했으며 편물의 질을 향상할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남자들의 필수 아이템은 니트 스타킹이었는데, 뜨개 길드는 부유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견고한 스타킹을 만드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663년에 영국이 노르망디에 공식으로 수출한 니트 스타킹만 24만 켤레에 달했고 이는 모두 남자가 만든 것이었다.

산업혁명기에 방직기가 발명되고 남자들이 기계에 몰리자 뜨개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여성의 노동이 됐다. 빠르고 정확한 기계에 견주어 손으로 편물 짜는 일을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쌩긴 것도 이때다. 그림 형제가 기록한 독일 구전 미신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남자가 말을 타고 나갔다가 실을 잣는 여자와 마주치면 불길한 징조이다. 그럴 때는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림 형제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다.

만약 방직기가 발명되지 않았고 뜨개가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면, 뜨개가 직업인 남자들이 여전히 많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뜨개 분야의 세게적 위인 몇 명쯤은 알고 있거나, 매년 뜨개 문화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을 올해는 누가 받게 될지 기대하며 한 해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마다 뜨개 문화를 장려하는 정부 부처가 있고, 뜨개의 과거와 미래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고, '사' 자나 '가' 자를 붙여가며 뜨개 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문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을.

 

나처럼 뜨개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으며 사실 싫어하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도, 애정이 담뿍 담긴 이 글을 읽다 보면 뜨개의 매력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굳이 뜨개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아, 이래서 뜨개를 하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는 정도면 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뜨개를 좋아하거나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뜨개와 여성성(여성스러움)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참 좋겠다.

얇고 가벼우면서도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굿!

 

2021.04.0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2020.11.23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김신회, <아무튼, 여름>

2020.04.1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최민영, <아무튼, 발레>

2020.02.2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류은숙, <아무튼, 피트니스>

2020.02.19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아무튼, 술>

2020.01.3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2019.12.3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조지영, <아무튼, 외국어>

2019.11.13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복길, <아무튼, 예능>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