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후지타니 지아키, <덕후 여자 넷이 한집에 삽니다>
사실 이 책은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너무 읽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이용하는 전자책 구독 플랫폼에 없어서 (내가 알기론 예스24에만 있는데 내가 이걸 안 쓴다) 언젠가 나중에 사서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당장 빌려 읽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저자는 제목 그대로, 다른 덕후 동료 셋과 같이 총 ‘덕후 여자 넷이 한집에’ 살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덕후로서 최애는 나날이 늘어가는데 집세는 비싸고, 그렇다고 수입이 쉽게 느는 것도 아니지. 게다가 공연을 보러 원정을 가느라 집을 비우는 시간도 많은데 굿즈 창고로 변해 버린 집에 높은 집세를 내는 건 낭비가 아닐까?’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생활비를 줄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저자는 15년 된 친구에게 같이 살 것을 제안하는데, 친구는 곧바로 OK를 날리지만 둘만 사는 건 갈등이 일어나기 쉬울 것 같으니 한 명을 더 끼워 넣자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덕후 친구들’ 단톡방에 이야기를 해서 두 명을 더 구했는데, 그중 한 명은 부모님이 셰어하우스 생활을 반대하셔서 다른 멤버로 교체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네 명이 의기투합!
책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저자를 비롯한 네 명이(참고로 저자인 후지타니 지아키 이외에 세 명은 모두 가명이다) 처음으로 같이 살기로 결심하고 집을 구하고, 계약서를 쓰고, 각자 이사를 마친 후 오순도순 살아나가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일이 시간순으로 차례차례 묘사되기 때문에 헷갈릴 일도 없고, ‘친구들끼리 셰어하우스를 하려면 뭘 고려해야 하고 뭘 준비해야 하지?’ 하는 궁금증을 가진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예컨대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쌀’, ‘당근’ 같은 이름이 쓰인 자석을 사용한다거나 괜찮은 집 후보를 보았을 때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해 같이 공유한다든가), 최소한 영감을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특히 코로나-19 이후로 일어난 변화도 언급되기 때문에 현재에도 충분히 유효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과 한국의 문화 차이가 있는 데다가 집을 구하는 건 아무래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 네 명의 덕후 여자들과 똑같은 상황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하우스 메이트의 세 가지 조건’이라는 꼭지에서 저자는 셰어 하우스에 같이 살 만한 사람을 찾을 때 고려해야 할 조건으로 ‘위생관념과 경제관념, 그리고 성관념’을 꼽았다.
되도록 깨끗하게 생활하고 싶은 사람과 다소 지저분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부딪힐 수밖에 없으니 위생관념 확인은 필수다. 금전 감각이 차이 나면 함께 생활하기 어려우니 경제관념이 비슷한 사람이 좋다. 아, 남의 돈을 훔치는 건 논외로 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남과 같이 살면 위험하지 않아?” 하고 물어오기도 하는데, 유산 상속처럼 가족이라 발생하는 금전 문제도 많다. (…)
얘기를 되돌리자. 연인을 집에 자주 데려오는 유형과 그런 행동을 싫어하는 유행은 갈등을 겪기 쉬우니, 성관념도 어느 정도 비슷한 편이 좋을 거다. 예전에 들은 얘기로는 여자 둘이 하우스 셰어를 했는데, 둘 다 연인을 자주 데려오는 유형이라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집 안에서의 가치관 공유가 중요하지 밖에서의 행동은 상관없다. 러브호텔에서 덕후끼리 상영회를 열고 야광봉을 흔들든지, 연인과 다른 걸 흔들든지 당사자 외에는 간섭할 일이 아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음담패설을. 사실 난 하우스 멤버들의 최애 캐릭터는 알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고, 앞으로도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멤버들도 나의 헤어진 연인에 관해 물어본 적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생활은 공유하지만 인생은 공유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하우스에서는 가족애나 연애 감정처럼 관계에서 오는 성가신 감정이 배제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요컨대 가족, 혹은 연인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물론 그런 게 없는 관계도 많겠지만 난 의외로 관계성에 압박을 느끼는 피곤한 유형이라.
반대로, ‘가족, 혹은 연인이라는 관계를 확인받고 싶다, 즉 소속감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는 유형은 셰어 하우스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 셰어 하우스를 추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 생활이 잘 맞는다고 얘기하겠다.
나는 2D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문화 쪽 덕후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번역자님이 책 내에서 언급되는 ‘레퍼런스’들을 잘 캐치하셔서 각주를 충실히 달아 놓으셨다. 예컨대 이 드립은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모 캐릭터가 자주 하는 대사를 따라 한 것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딱히 몰라도 ‘셰어하우스에서 어떻게 사이 좋게 잘 지낼 수 있는가’ 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아무래도 알면 더 재미있을지도? ㅎㅎ
친구들끼리 ‘야, 우리는 나중에 같이 실버 타운 들어가서 늙어서도 함께하자’라는 농담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은 정말로 연인이나 혈연 관계로 엮이지 않은 이들이 서로 배려하며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집착하는 ‘정상 가족’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친구들과 같은 집에서 살며 편안히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 그런 삶을 그린다면 이 책을 읽어 보는 게 그 꿈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덕후끼리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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