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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기호 외 13인, <킬러 문항 킬러 킬러>

by Jaime Chung 2025.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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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기호 외 13인, <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 앤솔러지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 세상’과 작가 10인이 <한겨레>에 연재한 소설과 이러한 취지에 공감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탠 것이라고 한다. 한 줄로 총평부터 내려보자면, 괜찮은 작품과 정말 실망스러운 작품이 뒤섞여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쪼오끔 나아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일단 장강명 작가는 ‘기획의 말’에서 앤솔러지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시민 단체가 장강명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을 청탁했는데, 자기 혼자 단편소설을 한 편 쓰느니 차라리 여러 작가가 이 주제로 짧은 소설을 연재하는 게 어떨까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민단체는 이를 받아들였고, 장강명 작가는 <한겨레>에 연재를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이 다양한 작가들이 한국의 공교육이라는 다소 크고 추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각자가 생각하는 다양한 ‘원인’에 대해 글을 썼다. 말하자면, 대표 기획자인 장강명 작가 말대로 “저희의 목표는 독자님들이 무언가를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할 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서 답하기는 어렵다.” 사실 현재 한국 공교육의 문제가 한 가지만은 아닐 것이고, 해결책도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이 더 의미있을 테다.

그렇지만 역시 문제는, 주제가 아무리 좋아도 내용물 자체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그래서 글의 내용과 분위기에 적절하게, ‘이게 뭐야?’ 싶지 않게 결말이 잘 끝맺음된 것이 절반, 그렇지 않은 게 절반이라는 느낌이다. 이 앤솔러지의 표제작인 <킬러 문항 킬러 킬러>는 장강명 작가의 작품인데 정말 의외로 실망이었다. ‘킬러 문항’이란 다들 알겠지만 1등급을 가르는,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말한다. ‘킬러 문항 킬러’는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는 수능에서 출제하면 안 된다”라는, (수능 다섯 달 전에 무책임하게 내뱉어진) 대통령의 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 킬러 킬러’는? ‘그런 대통령을 암살하는 자인가?’ 하는 생각으로 다소 설레서 (시국이 시국인지라…) 읽었는데, 엥, 이게 뭐야? 간단히 요약하자면, ‘킬러 문항 킬러 킬러’는 주인공 소년이다. 수능 시험 당일,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는 “열두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게 만든다는, 한 알에 수백만 원에 거래된다는 약.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다는 전설의 약”을 소년에게 건네준다. “교육 당국은 이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적발되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열띤 설득, 협박, 어르고 달래기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결국 그 약을 먹지 않기로 선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먹는 척만 하고 나중에 화장실에 가서 이를 버린다. 소년의 행동은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행위이며 나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소년을 ‘킬러 문항 킬러 킬러’로 만들어 주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일단 ‘킬러 문항 킬러 킬러’라는 기가 막힌 키워드, 표현을 먼저 생각해 내고서, ‘근데 이걸 어떻게 구현하지?’ 고민하다가 억지로 잘 어울리지도 않는 설정에 갖다붙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킬러 문항 킬러’가 대통령이면 그 ‘킬러 문항 킬러 킬러’는 대통령을 죽여야죠! 이 소설 제목만, 이 표현만 듣고 기대한 거랑 너무 다르잖아요! 괜히 설렜어…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반면에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건, 박서련 작가의 단편 <다른 아이>였다. 이건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한 아이의 엄마 이야기이다. 아이 엄마는 잔뜩 흥분해서 아이의 ‘클래스 티처’ 마이클에게 면담을 신청한다. “마이클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어제 피터가 했다는 소꿉놀이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라는, 지극히 한국 학부모 (요즘엔 ‘학부모’ 대신에 ‘보호자’라고 하는 것 같더라만) 말투로 시작하는 아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남자애랑 남자애랑 커플을 시켰다면서요.”라는 것이다. 아니, “아직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은 아동들에게 그런 식으로 성소수자 역할을 맡기”다니? 이 아이 엄마는 차별 금지법을 이론으로는 받아들일지 몰라도, 당장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들이 게이일지도 모르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소설 속 표현대로 “까딱하면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중산층 가족을 박살 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자식이 커밍 아웃을 하는 거라는 농담처럼. <마법 소녀 은퇴합니다><마법소녀 복직합니다>,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등, 자신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성소수자들을 그려낸 박서련 작가다운 이야기랄까.

 

고전인 박지원의 <허생전>을 패러디한, 최영의 <대치골 허생전>도 퍽 재미있다. 허생에 현대 한국 사회에 산다면 정말 이러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명품이라 일컫는 호사품의 수선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하였다’라는 디테일까지!)

허생은 대치골에 살았다. 곧장 한강을 건너 양재천 근처에 닿으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서 있고, 그 아파트 단지를 향하여 철제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빌라는 비바람을 겨우 막을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명품이라 일컫는 호사품의 수선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하였다.

하루는 처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고시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 합니까?”

허생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아직 공직에 나아갈 만큼 독서에 익숙하지 않소.”

“그럼 의전원 시험이라도 보지 못하시나요?”

“나는 주삿바늘만 봐도 기겁하거늘 어찌 의원이 될 수 있겠소?”

“그럼 변시라도 보지 못하시나요?”

“문송할 따름이오.”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대답으로 기껏 ‘못 한다’는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의원도 못 한다, 변리사도 못 한다, 하면 로스쿨에 진학해서 변호사 자격이라도 못 따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놓고 일어났다.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 것을……” 하고는 문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앞에서 말했듯 모든 작품의 마무리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썩 좋은 작품이다. 나는 공교육을 졸업한 지 오래되었으나 재미있게 읽었다. ‘현직’ 청소년들이 보면 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들이 읽으며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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