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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레베카 터식, <시팅 프리티>

by Jaime Chung 2025.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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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레베카 터식, <시팅 프리티>

 

 

이 책은 휠체어 사용자인 저자의 에세이이다. 제목에 쓰인 ‘시팅 프리티(sitting pretty)’는 역자 주대로,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sitting pretty는 말 그대로 해석하면 ‘예쁘게 앉아 있다’는 의미이지만, ‘안락하고 좋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관용적 의미도 있다.” 저자는 어린 나이에 암을 앓았고, 영구적 마비를 진단받았다. 따라서 이 표현은 휠체어를 쓰기에 ‘(휠체어에) 예쁘게 앉아 있다’라는 표면적 의미와 ‘안락한 상황(대체로 돈이 많아서)에 처해 있다’(케임브릿지 사전)는 관용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저자는 자신이 “휠체어로도 잘 돌아다니고, 잘 지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자명으로 정했다고 밝혔다(그의 트위터 아이디는 ‘@sitting_pretty’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표현이 반어법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느꼈다. 책 후반에 저자가 고백하듯이 어마어마한 치료비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던(물론 저자 본인도 좋아했으나 연애 감정이라기보다는 남동생에 가까운 느낌으로 좋아했던) 남자 친구와 성급하게 결혼을 올렸을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남자에게는 의료 보험이 있었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국 의료 보험 체계가 형편없어서 사보험 없이는 병원 한번 갔다가는 파산할 정도로 엄청난 청구서 폭탄을 맞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장애인이어서 (복지 혜택 등을 받으며) 편하게 잘살겠다’라는, 비현실적이고 악의적인 편견을 비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김지우의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장애인’ ‘여성’은 ‘여성’이었다. 바다 저 건너편에 사는 미국인인 저자도 자기가 어릴 적에 자신이 여성으로서 남자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기 위해서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경험하기 전에, 예를 들면 글을 읽는 법을 배우고, 초콜릿 파우더 봉지를 뜯어 핫초코 타는 법을 깨우치고, 첫 번째 절친을 사귀기 전에 나는 이미 두 가지를 알고 있었다. 바로 남자애한테 사랑받는 것은 필수라는 것과 사랑은 아름다움을 통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저자는 자기가 봐 왔던 미디어 속 여성들처럼 장애가 없고, 아름다운 모습의 자신을 상상했다. 그래야만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상은 곧 오래가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누군가가 그날 오후에 찍은 영상을 보았다. 영상을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배를 칼에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 영상은 흑백의 크리스티 털링턴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내 몸통은 두껍고 뒤틀려 있었고,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다리에 비해 어깨가 너무 넓었으며, 발은 무거운 회색 부츠를 신고 있는 듯 보였다. 도무지 영상을 계속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섬뜩했다. 영상 속 내가 내 안에 축적된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 그러니까 가냘프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상처 없이 매끈하고, 무엇에도 제약받지 않고 자유로운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나는 계속해서 충격을 받았다. 실제 나의 모습은 내가 보았던 훨씬 애처로운 이미지와 흡사했다. 나는 의료 행위와 관련된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고 망가진 무언가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도 아니었고, 내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습도 아니었다. 나는 모든 이미지에서 내 하반신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적 없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척도 할 수 있었다.

어린 소녀에게 ‘너는 아름답지 않아’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자체가 끔찍한데, 저자는 장애가 있어서 더더욱 그 이미지들과 거리가 멀다고 느꼈을 테니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메시지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충격이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지금 네 모습으로는 충분하지 않아’라는 메시지를 받으면서 산다. 솔직히 비장애인 여성도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심지어 모델들조차 잡지 속 모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내가 비장애인 여성의 경우를 가져옴으로써 물타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중점으로 돌아가자. 어쨌거나 중점은 저자가 어릴 적에 여성 혐오에 기반한 이미지를 접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그들과 비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에게 장애와 관련한 논의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단, 장애인도 사람이고 그래서 존중받아야 하고 정치며 사회며 문화며, 이 삶의 모든 면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백한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이런 접근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완벽히 정상이고 장애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고나 불행한 일로 인해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돕고 싶다. 나에겐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길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게다가 ‘정상’ 또는 ‘비장애’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다. 예를 들어, 안경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는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이나 근시/난시 등은 장애로 여겨졌을 것이다. 지금이야 안경이니 다른 의료적 처치로 인해 시력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나 안경을 쓰는 것은 ‘장애’로 여겨지지 않지만. 게다가 아래에 내가 가져온 인용문에서 설명하듯, 사람은 제한된 시간 동안 ‘장애’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건강’이나 ‘정상’, ‘비장애’라는 개념은 우리가 온전히 평생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이래도 이게 남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덧붙여, 사람이라면 종종 ‘장애가 있는’ 상태를 넘나든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독감에 걸리거나, 극심한 생리통을 앓거나, 임신하거나, 나이가 들며(헉!) 갑작스레 장애라는 한계를 경험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수명이 충분히 길다면,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장애인이 될 것이다. 이는 몸을 소유하고, 몸 안에서 살아가고, 몸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 중 일부가 ‘건강한’이라는 범주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스피드, 생산성 그 외 플러스 알파, 그리고 거의 없다시피 한 화장실(그리고 화장실에 갈 쉬는 시간)을 기반으로 세워진 세상은 우리가 들어가 사는 실제 몸을 고려하거나 보살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비장애중심주의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대상이 장애가 있는 몸이기에 장애인이 선발 주자로서 그것의 공개 처형을 촉구하며 구조물에 불을 지르고, 저항하고, 시위하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비장애중심주의의 지시하에 살아가고 있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 모두를 처벌한다.

가장 핵심만 남긴 채 압축하고, 쥐어짜 단순화한 형태로 말하자면, 비장애중심주의는 거의 상상속에나 존재할 법한 이상적인 몸을 선호하고, 맹목적으로 집착하며 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구축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러한 헛된 환상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보고, 듣고, 처리하고, 작동하고, 주시하고,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고 인식되는 몸을 차별하는 과정이다. 흔히 환상과의 편차가 클수록 차별도 더 심해진다. 다시 말해, 비장애중심주의는 어린 소녀가 일주일 동안 스스로를 공주처럼 소중하게 여겨놓고 왜 그 다음주에는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져 의기소침해지는지에 대한 가능한 답 중 하나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노고에는 감사를 전하지만, 내 정의가 더 나은 것 같다.)

 

이 외에 저자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담론을 가르치며(저자는 원래 교사로, 영어를 가르쳤다)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희망과 보람을 느끼기도 한 경험을 비롯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데 다 소개할 수 없어서 아쉽다. 확실히 읽어 볼 만한 에세이다. 진짜 생각할 거리가 많은데, 흠을 찾자면 번역 자체는 괜찮으나 교정교열을 본 건지 안 본 건지 문법이 형편없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든지’와 ‘-던지’를 틀리고, ‘-지’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지’도 아닌데 띄어서 쓰며(도대체 왜?), 추측의 의미를 담은 ‘-ㄹ걸’을 잘못 띄어쓴다. 도대체 교정교열을 안 볼 거면 책은 왜 내는 건지 모르겠다. 이 좋은 책을 이런 이유로 별 하나를 깎았다. 내가 누누히 하는 말이지만, 번역가는 맞춤법을 틀릴 수도 있다. 그건 편집자가 직접 봐서든, 아니면 교정교열 전문가에게 아웃소싱을 해서든 고쳐서 내야지. 다음 판이든 쇄이든 기회가 될 때 꼭 다 고쳐서 다시 내 주시기 바랍니다. 책 자체는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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