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줄리엣, 네이키드(Juliet, Naked, 2018) - 남자 친구가 노답 오덕이에요, 어떡하죠?
감독: 제시 페레츠(Jesse Peretz)
이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일단 터커 크로우(Tucker Crowe, 에단 호크 분)라는, 한때 전설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어 버린 락 스타가 있다.
그리고 그를 숭배하는 한 남자, 던컨(Duncan, 크리스 오다우드 분)도 있다. 던컨은 터커 크로우의 진성 빠돌이이다.
그는 지금까지 발매된, 그리고 발매되지 않은 터커 크로우의 노래를 전부 안다. 취미는 터커에 관한 웹사이트에서 다른 팬들과 터커에 대해 논의하는 것.
던컨의 숨 쉬듯 자연스러운 덕질 때문에 그의 여자 친구 애니(Annie, 로즈 번 분)는 고생이 많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터커의 노래를 끊임없이 들으며 터커를 숭배하는 던컨 때문에, 자신이 터커를 사귀는 건지, 던컨을 사귀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던컨 앞으로 터커의 미공개 음원(던컨이 명반으로 여기는 "Juliet" 앨범의 초기 버전)이 담긴 CD가 배달되고, 애니가 집에 먼저 도착한 탓에 별 생각 없이 이를 먼저 받아 듣는다.
집에 와 던컨에게 터커의 새 음원이 CD로 배달됐다고 하니, 던컨은 "배신의 냄새가 코를 찔러서 여기에서는 못 듣겠다"며 CD를 들고 지하실로 휙 가 버린다.
새 CD를 듣고 약간 기분이 누그러져서 돌아온 던컨에게 애니는 자신이 터커의 음악을 먼저 들어서 미안하다고, "음악이 '황량하다(dready)'고 미리 말해 줬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하데, 역시나 진성 빠돌이인 던컨은 "그 음악이 어디가 황량해? 완전 명곡인데!"라며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다.
아니, 갈고 다듬기 전의 러프한 버전, 초기 버전이 완성 버전보다 더 좋다니? 던컨을 이해할 수 없는 애니는 그날 밤, 던컨이 자주 가는 터커 크로우 팬사이트에 그 앨범에 대한 '악평'을 써서 올린다.
물론 다음 날 던컨은 이를 보고 환장을 하지만, 그래도 애니의 속은 좀 시원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애니의 혹평을 보고 "옳은 말"이라며 메일을 보냈다. 발신자를 보니 터커 크로우? 그 락스타 본인? 엇,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닉 혼비(Nick Hornby)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원작 소설은 국내에 <벌거벗은 줄리엣>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되었다).
원작 소설은 한 3년 전쯤 읽은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이 영화와 비교해 볼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잘 살렸다는 느낌이다.
나는 <IT 크라우드(The IT Crowd)>로 친숙한 크리스 오다우드(Chris O'Dowd)가 빠돌이 역할을 너무나 잘 연기해서 나는 애니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봤다.
이 영화/소설은 줄거리 자체가 재미도 있지만, 군데군데 생각해 볼 만한 거리도 제공한다.
내가 보기에 괜찮은 논의점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아래 짤들 이하에 쓰겠으니, 총평을 원하는 분들은 스크롤 바를 쭉 내려서 번역본 표지 사진 이후부터 읽으시면 된다.
터커는 자신의 옛날 음악(던컨이 덕질하는)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도 그 음악을 싫어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원저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든 간에 독자/관객은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건 자유다, 던컨 말대로.
그런데 터커가 자기 옛날 음악을 싫어하는 걸, "너는 천재라서 이런 거는 그냥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니까 별거 아니겠지"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천재라고 해서 노력을 단 1g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고,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노력을 할 텐데.
보통 남의 노력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스스로는 노력을 절대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남의 노력을 그냥 '재능', '천재'라는 단어로 깎아내린다. 던컨이 하는 게 딱 이런 거다.
던컨을 보면 덕후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예컨대,
- 자신이 덕질하는 상대방에 대해 모든 것을 외우는 것 - 던컨은 터커가 음악만 들어도 어떤 공연에서 부른 버전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 덕심이 뻐렁친 나머지 머글에게도 자신의 덕질 상대가 얼마나 멋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 애니의 동생인 로스(Ros, 릴리 브레지어 분)가 데려온 여자 친구에게도 터커의 음악을 들려준다. 물론 그 여자애는 예의상 관심 있는 척 음악을 조금 듣다가 지루해져서 벽에 붙은 터커 사진만 바라본다. 사실 "네 새끼 너나 예쁘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런 행동은 사실 이 다음에 나오는 행동에 비하면 애교다.
- 덕질의 상대를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인형이나 가상의 등장인물 정도로 대한다 - 던컨은 터커 본인 앞에서 자신이 터커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를 보여 주려고 "줄리("Juliet" 앨범의 영감이 된, 줄리 비티(Julie Beatty)라는 모델)와의 이별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어서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했던 거냐 따위의 말을 한다.
이게 영화가 아니고 실제 상황이었다면 터커가 던컨 뺨을 한 대 때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 더 (또는 다) 알고 싶은 마음이야 백 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팬들 마음에 들 정도로 가능했던 적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던컨도 대중에게 알려진 정보 - 터커와 줄리의 이별 소식 같은 것 - 를 가지고 자신이 터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싶었겠지만, 사실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연인 관계는 본인 둘만 아니면 모르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낱 팬 주제에, 타인의 사생활을 가지고 '줄리와의 이별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어서 다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거 아니냐' 운운이라니.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이건 무슨 게임 속 캐릭터 설정도 아니고... (그리고 실제로 왜 터커가 그날 그 공연장을 빠져나가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했는지 그 사연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영화 끝에) 긴 공백기를 끝내고 새 앨범을 발매한 터커에게 "행복은 독이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게 최악이다.
물론 음악적 스타일이 바뀐 것에 실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우상이 늘 불행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 악취미 아닌가.
터커는 이제 자립도 하고, 다시 음악도 하게 되고, 여러 모로 예전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던컨은 그런 터커를 축하해 주거나 그의 재도전에 기뻐하기는커녕, 예전 음악이 좋았는데 지금은 배가 불렀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던컨이 터커라는 사람 그 자체를 숭배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 줄 대상을 필요로 했던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애니가 지난 15년을 낭비한 게 아닌가 고민하는 게 너무나 이해되고, 또 애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다행히 이 이야기는 애니에게 해피 엔딩이다. 터커에게도 그렇고.
덕질과 지나온 세월을 후회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도하는 것 등에 주제에 관해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져 주는 영화다.
닉 혼비의 원작 소설과 비교하며 봐도 괜찮을 듯. 참고로 영화에서 애니의 동생으로 나오는 '로스'라는 캐릭터는 원래 소설에서는 그냥 애니의 친구였다.
또한 소설에는 말콤이라는, 애니의 상담가(정신과 의사)가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이 캐릭터를 과감히 생략했다.
그래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니 안심하고 보시라. 재미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