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데이비드 엡스타인,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오랜만에 논픽션을 읽었는데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었다.
저자가 열심히 자료를 조사해서 쓴 게 티가 나고, 흥미로운 일화와 실험 결과가 풍부하다.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고무적이고.
일단 책의 부제목("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이 말해 주듯, 이 책은 '일찍 시작해 한우물만 판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는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서문에 등장하는 예를 빌리자면, 타이거 우즈처럼 되는 것보다 로저 페더러처럼 되는 것이 더 이 시대에 적절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이과든 문과든 예체능이든 일찍 진로를 정해서 거기에 올인을 해서 평생 그 분야의 경험을 쌓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찾기 쉽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고(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진로를 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또 직접 경험해 보아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원하는 바와 달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일도 흔하다.
게다가 요즘 예상 수명은 또 얼마나 긴가. 한 가지 일 또는 분야에만 종사하기에는 참 긴 시간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이직 또는 분야 전환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성공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서문에서 언급된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 같은 스포츠 선수들의 맥락에서 이를 알아보자.
과학자들이 유년기 초부터 운동선수들의 발달 과정 전체를 살펴보았는데, 엘리트 선수와 준엘리트 선수들을 나누어 비교했다(여기에서는 엘리트 선수가 성공한 이들을 나타낸다고 보면 되겠다).
이윽고 엘리트가 되는 이들을 보면, 대개 초기에는 훗날 자신이 전문가가 될 바로 그 종목에서 신중한 훈련에 쏟은 시간이 사실상 더 적었다. 대신에 그들은 전문가들이 <샘플링 기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거친다. 대개 체계적이지 않거나 체계가 엉성한 환경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하는 기간을 말한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그들은 몸을 쓰는 기술들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알게 된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한 분야에 집중해 기술을 갈고닦을 준비를 한다. 개인 스포츠 종목의 운동선수들을 연구한 한 논문은 제목에서 <늦은 전문화>가 <성공의 열쇠>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단체 스포츠에서 최고가 되는 법: 늦게 시작하고, 집중하고, 단호해져라❯.
책에서도 나오는 일화 비슷한 에시를 들자면, 예컨대 자녀에게 악기를 가르친다고 치자.
양육자가 '자, 너는 이제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거야!' 하는 것보다 자녀에게 바이올린, 피아노, 피콜로 등등 다양한 악기를 접하게 해 주고 그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전공하게 하는 것이 자녀 본인의 만족감도 높고 성공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악기를 골라서 더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 악기와 음악에 대한 여러 경험을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 나는 첫 책 ❮스포츠 유전자(The Sports Gene)❯의 후기에 스포츠에 늦게 뛰어든 이들을 조사한 연구 결과들을 조금 언급했다. 다음 해에 나는 의외의 사람들로부터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운동선수도 코치도 아닌 퇴역 군인들이었다. 강연 준비를 하면서 나는 스포츠 세계 바깥에서 전문성과 전직을 다룬 연구가 있는지 과학 학술지들을 뒤졌다. 나는 논문들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연구는 일찍부터 한 분야을 파고든 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더 먼저 자리를 잡지만, 늦은 전공자가 자신의 역량과 성향에 더 맞는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늦게 시작한 사람의 불리함을 보완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술 발명가들이 한 분야를 더 깊게 파고든 또래들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때 창의력이 더 향상된다는 것을 보여 준 연구도 많았다. 깊이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폭을 넓히는 쪽이 경력이 쌓여 갈수록 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예술 창작자들을 조사한 연구도 거의 동일한 결과를 내놓았다.
한 가지 분야에 깊게 천착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좁은 전공 분야만 집중하다 보면 그 세부 분야가 아닌 다른 부분에는 오히려 까막눈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동물학자라면 일반적으로 개, 고양이, 양, 소, 닭 등 다양한 동물들을 연구할 텐데, 그중에서도 고양이, 또한 그중에서도 페르시안 고양이 한 종만 들입다 판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동물학자는 동네 동물병원에서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전문 분야가 좁기 때문이다.
예시를 좀 가볍게 고양이로 들어서 그렇지, 공학, 과학 쪽으로 눈을 돌린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는 자연에 실재하는 존재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그 자연이란 게 우리가 딱 칼로 자르듯 나눈 학문 한 가지만 적용해서 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를 풀 때 두 가지 이상의 학문에 관한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자신이 아는 메인 분야와 완전히 다른 시각이나.
나는 고도의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실제로는 경험이 쌓일수록 더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될 수 있으며, 그런 와중에 오히려 더 자신만만해지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 — 위험한 조합이다— 을 보여 주는 연구들을 살펴보았다. 또 여러 인지심리학자들을 만나면서, 너무나 많은 놀라운 연구 결과들이 무시되곤 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래가는 지식을 쌓으려면 학습 자체가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는 연구들이 대표적이었다. 그 말은 설령 학습한 직후에 치르는 시험에서는 성적이 형편없게 나올 때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다싯 말해 가장 효과적인 학습은 별 효과가 없는 양 보인다. 즉 뒤처지는 듯이 보인다.
빙엄은 기존 기업들이 이른바 국소적 탐색을 통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써서 전에 효과가 있었던 해결책을 써보는 것이다. 한편 외부인들을 초청하는 그의 방식이 너무나 효과가 좋았기에, 일라이릴리는 아예 독립시켜서 별도의 기업을 세웠다. 이노센티브(InnoCentive)라는 이 회사는 어떤 분야의 기관이든 간에 <의뢰자>로부터 비용을 받고 그 <도전 과제>를 사이트에 올려서 해결책을 제시한 외부 <해결자>에게 보상을 한다. 도전 과제 중 약 3분의 1 남짓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노센티브가 선정하는 문제들이 당사자인 전문가가 해결 못 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놀라운 비율이다. 그러면서 이노센티븐은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의뢰자가 올리는 문제를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다양한 해결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다듬는 것이 바로 요령이었다. 도전 과제가 과학자들뿐이 아니라 변호사와 치과 의사와 수리공에게도 달려들 만한 것으로 비칠수록, 해결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
이노센티브는 어느 정도는 전문가들이 점점 더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어 감에 따라서 <상자>가 러시아 인형과 더 비슷해지기 때문에 작동한다. 전문가들은 더 하위 분야들로 전문화하며, 그 하위 분야들은 더욱 하위 분야들로 나뉜다. 설령 작은 인형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도, 여전히 좀 더 큰 인형 안에 들어 있을 뿐이다. 크래진과 데이비스는 애초에 상자 바깥에 있었고, 훈련과 자원의 모든 이점을 지닌 듯한 내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뻔한 해결책을 보았다. 해결자 자신도 어떤 기업이나 산업 전체가 풀지 못하고 있는 과제를 자신이 해결할 때 의아해하곤 한다.
한 외부인 해결자는 결핵 치료제의 제조에 생긴 생산 문제를 도와 달라는 존슨앤존슨의 요청에 응답한 뒤 ❮사이언스❯에 이렇게 말했다. "사흘에 걸쳐서 저녁에 그 해답을 적었어요. 큰 제약 회사가 이런 문제를 왜 풀지 못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하버드 혁신과학연구소의 공동 소장 카림 라카니(Karim Lakhani)는 이놋센티브 해결자들에게 문제가 자신의 전공 분야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등급을 매겨 달라고 했다. "문제가 해결자의 전문 분야와 거리가 멀수록, 풀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살다 보면 어떤 일에 끈기를 가지고 매달려야 할 때도 있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경험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힘든데 여기에서 포기하면 비웃음받을까 봐, 또는 나약하다는 평을 받을까 봐 억지로 질질 끄는 것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게 직업이든, 취미든, 무엇이든 자신과 맞지 않는다, 또는 가능성이 아무래도 없다 싶으면 빨리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또는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는 거니까.
윈스턴 처칠의 <결코 포기하지 마라. 결코, 결코, 결코>라는 말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그 문장의 나머지 부분은 으레 빼먹는다. <명예와 양식에 따라 확신이 들 때를 제외하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 책은 '전문성'을 무시하는 건 전혀 아니다. 전문성을 가지되, 다양한 분야에 경험, 관심, 지식을 가지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메인'이 되는 전문 분야를 가지되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면 그 관심사에 관한 지식을 자신의 메인 분야와 융합해 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신이 오래 해 온 일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라거나, 전직, 업종 전환 등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면 이 책이 심적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학생이나 진로 상담을 해 주어야 하는 교사 등이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리디셀렉트를 이용한다면 꼭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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