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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by Jaime Chung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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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예컨대 주식을 잘 모르는 초보자는 ‘주린이’, 이제 막 헬스를 시작한 사람을 ‘헬린이’라는 식으로. 이게 아동 차별적 언어니 쓰지 말자는 주장은 그런 말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존재했는데 (이에 관련한 기사를 참고하시라.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아직 완전히 이 언어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나도 이 말을 안 좋아하는데, 방금 내가 링크한 기사처럼 이것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가장 근본적으로 털이 부숭부숭한 다 큰 어른이 어린 척, 귀여운 척, 보호받아야 하고 도움받아야 하는 척하는 게 아니꼽기 때문이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어야지! 그냥 ‘초보자’나 ‘입문자’ 같은 단어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걸, 굳이 어린이까지 끌어들여 자신들 모에화에 써야 하나? 😫

 

이 책은 내가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어린이날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다. 어린이들에게 독서를 지도하는 독서 교실 선생님인 저자가 어린이들과 가까이 지내며 느낀 바를 담았다. 어린이에게 다정한 선생님인 저자를 보며 존경스럽다는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선생님도 귀여우시군요!’ 하고 생각했다. 어린이 같은 약자를 이렇게 존중해 주는 사람이 좋지 않은 사람일 리가 없어! 근데 귀여우시기까지!

 

책 첫머리에 있는 ‘저자 소개’에서부터 감탄이 시작된다.

어느 쪽이든 어린이들에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아는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어린이를 배워야 하고 부족한 존재로 보는 시각은 참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라는 꼭지를 읽으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 꼭지에서 저자는 신발 끈을 묶으려고 노력하는 아이(’현성이’)와 대화를 나누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는 있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두 번째 꼭지, ‘착한 어린이’는 저자의 귀여움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하는 장(章)이다. 물론 동시에 저자가 어린이들로부터 배우는 멋진 어른이라는 사실도 잘 드러난다.

그래, 그동안 내가 노력한 게 있었지. 어린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어른도 책을 읽는다는 것, 어른도 모르는 게 있으면 공부한다는 것. 그게 통했구나. 얼마나 확신이 있었으면 친구한테 장담까지 했을까. 그래, 어른도 책을 읽는다. 책 읽는 사람은 멋있다. 그게 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비논리적 자화자찬 회로가 돌아갔고, 논리적 결과로 코가 조금 올라갔다.
“그래? 그렇다면 선생님이 설명해 주지!” 아홉 살이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해, 또한 내가 지적으로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 인류의 수렵 채집 시절과 농경 시절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잉여 생산물’과 ‘물물교환’을 설명할 차례였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 보니까, 드디어!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산하게 된 거야. 우리 마을에서 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윤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눠 줘요!”
그 밖에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하윤이에게 경제 논리를 설명하려니 나는 갑자기 속이 시커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좀 전까지는 되게 멋있는 어른이었는데. 어린이는 왜 이렇게 착할까. 그런데 나는 하윤이에게 착하다는 말 대신 “어,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하고 답했다.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쓰기가 늘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_____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십 한 번째로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이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차마 칠판을 지울 수가 없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눠 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 “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메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나도 어릴 적에 저자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까? 뭐,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약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더 나은 어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면 나를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얻을 테니까.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모든 이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책이다. 위에서 내가 인용한 것보다 귀여운 부분이 훨씬 더 많으니 귀여운 걸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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