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유즈키 아사코,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차별의 언어는 곳곳에 숨어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극장이나 예를 갖춘 자리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숙녀 신사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사’들이 ‘숙녀’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우선시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의례적인 표현을 살짝 비튼 제목의 단편 소설집,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은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차별을 지적하는데, 단순히 그냥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유쾌하게 반전시켜 보여 준다.
예컨대 <둔치 호텔에서 만나요>는 자신이 불륜한 이야기를 미화시켜 소설로 써먹은 한 소설가 모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를 놔두고 기미코라는 여자와 불륜을 했다. 그 배경이 된 호텔은 이제 30년이 지나 노인과 손주들이 놀러오는 곳으로 탈바꿈했지만, 이 소설가는 불륜하는 사람들 특유의 그 촌스러운 감성과 옛날 구시대적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 없이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놀러 온 남자 우스이를 내심 비웃고, 이 호텔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아직도 젊고 예쁜 여자만 보면 자신의 불륜 상대가 떠올라 말을 거는데, 결국 그는 ‘시대가 변했으니 여성 손님들이 불쾌해하시지 않도록 그런 발언을 자제해 달라’는 주의를 받는다. 아이고 쌤통이다!
고소한 부분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모리는 자신의 불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우스이에게 해 주는데, 그는 정상인이라 도통 불륜남녀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불륜 상대와의) 행복의 절정에서 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라는 소설의 전개에 의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몸도 마음도 절정을 맞은, 그 한순간이야말로 그녀의 여자로서의 정점이었던 거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어.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라네.”
”그러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앞으로 더 행복해질 거였는데, 그 사람 혹시 우울증 증세가 있었던 것 아니에요?” (…)
”자네,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이혼하고 애인과 함께한다 해도 막상 두 사람의 생활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녀는 가정을 꾸린 경험이 있으니까 더 잘 아는 거지.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일 속에서, 점점 사라지지 않겠나?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이…….”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일이라…….” (…)
”그럼 남자가 집안일을 절반 이상 부담하고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내겠습니다, 하고 계약서를 쓰면 해결되잖아요.” (…)
”굳이 죽을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요……. 상대방이 죽고 싶을 만큼 앞으로의 생활이 불안하다고 하면, 잘 이야기를 나눠서 집안일을 더 많이 맡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아니, 집안일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자네도 연애할 때가 아내와 더 남자와 여자로 마주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지금보다 여유롭고 윤택했을 테지. 그 점은 사실 아닌가?”
”으음, 그렇긴 하네요. 그 무렵에는 밤 근무를 하고 나면 늘어지게 잘 수 있었으니까요.” (…)
”돈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영혼의 이야기를 하는 걸세!”
참고로 이 모리라는 작자는 자기는 불륜을 저지른 주제에, 아내와 이혼하고 그 불륜 상대인 여자와 결혼해 다시 ‘생활’해 나갈 용기조차 없어 아내와는 이혼도 안 했고, 불륜 상대인 기미코는 그런 그의 모습에 정이 떨어져 그와 헤어졌다. 그런 주제에 남녀로서 순수한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장연설을, 성실하게 애 둘 잘 키우면서 사는 우스이에게 늘어놓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모리를 위해 준비된 반전이 있는데 그것까지는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고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애초에 나를 이 단편 소설집에 관심을 가지게 한 건, <아기 띠와 불륜 초밥>이라는 단편이다. 알라딘에서 신간 구경을 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됐고, 책을 소개하는 카드 뉴스 형태의 짧은 만화를 봤는데 너무 흥미로웠다. 이 단편은 아래 만화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니 출판사에서 제공한 만화로 소개를 갈음하겠다(실제로 끝까지 읽어 보면 더 재미있다).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는 지하철 여성 칸에 탄 여성들을 위협하던 (”이 칸은 일본의 남녀평등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찌질남 다케루가 순식간에 ‘용사 다케루의 전설’이라는 제목의 판타지 RPG 게임에 빙의하면서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지하철 여성 칸에서 민폐 짓을 벌이던 중, 갑자기 마법 나라에 떨어지게 되고 거기에서 괴물들을 처치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클리어한 게임이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를 대하는 마법 나라 사람들의 태도는 무척 냉랭하다. 전투에 지쳐 잠시 쉬며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고 싶어도 물 한 잔만 달라는 부탁에 “모험을 시작한 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일 아닌가요? 그럼 남한테 기대지 말고 목숨 걸고 노력해야 하지 않나요?”라는 쌀쌀맞은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이것은 여성이 사회 생활에서 받는 대우를 ‘미러링’한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 예컨대 직업적인 활동이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 부모나 주위 사람을 돌보는 일 등은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져 사회나 정부는 이에 도움을 주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여성들이 하는 일로 득을 보는 것은 사회 전체이지만, 여성이 그 일을 하는 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여성이 이 사회에 속한 것처럼 지적질을 해대기에 바쁘다. ‘용사 다케루’가 마법 나라 국민들에게 듣는, 외모에 대한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참고로 아래 인용문에 언급되는 ‘미케’는 게임 진행을 돕는 요정 캐릭터이다).
(…) 멱을 감고, 옷을 빨아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수염을 깎고 몸단장을 했다. 그러느라 모험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 소문이 순식간에 여섯 번째 왕국까지 쫙 퍼져 다케루는 더욱 미운털이 박혔다. 마을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히죽거리는 얼굴로 외모와 나이를 들먹이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들어야 했다.
”저는 주어진 일을 다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외모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말까지 들어야 합니까?”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리자, 사람들은 한순간 조용해진 뒤 다케루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꾸했다.
”용사 주제에 약해 빠진 사람처럼 굴다니!”
싸움에서 계속 이겨야 하는 것은 물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파이널 월드에 도달할 무렵에는 국민의 요구를 어떻게든 충족시키려는 노력 끝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쭈그려 앉기만 해도 미케까지 구박하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걸음을 계속했다. 게다가 요괴들은 다케루를 발견하면 부지런하다 싶을 만큼 확실하게 공격해 왔다. 솔직히 제대로 쉴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 음식을 제공해 주고 국민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용사들을 거듭 소환해서 쓰고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면 이번에야말로 살해되리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도움 하나 받지 못하고 또 동시에 많은 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여성의 삶을 게임 속 용사의 삶에 비유한 게 정말 기가 막혔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너무 공감이 됐고, 이 단편은 결말까지 너무 신선하고 좋았다. 이건 아마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편만 더 추천하자면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를 꼽겠다.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던 시기의 일본이 배경인데, 화상 회의 앱인 Zoom으로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 여성은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집에서 나와서 자신만의 공간을 구했는데, 갑자기 전 시아버지가 집에 들이닥친다. 자신도 그 아들 놈과 같이 살고 싶지 않으니 (전 며느리인 주인공과) 같이 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전 시아버지를 몰아붙이지만 일단 집에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요리, 청소, 아이 돌보기 등의 집안일을 잔뜩 시킨다. 의외로 전 시아버지는 전 며느리의 명령을 고분고분히 따르고, 전 시아버지의 내조 덕분에 마음 편하게 외출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이 하는 집안일이 ‘생계 부양자’들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를 ‘미러링’을 통해 보여 주는 단편이다.
약 300쪽(종이책 기준)의 이 단편집은 여성 문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성의 시각으로 잘 쓰였다. 내가 이전 서평들(박윤진,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 김용언 외 7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에서도 썼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같은 여성 혐오적 문학에 지쳤다면 신선한 봄바람 같은 이 소설들을 읽으며 마음을 깨끗하고 새롭게 하는 게 어떨까. 여성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남성들에게도 추천한다. 한번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이렇게나 우아하고 유쾌하게 전복을 꿈꿀 수 있음에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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