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타라-루이제 비트베어, <온 세상이 우리를 공주 취급해>
독일의 페미니스트 콘텐츠 ‘인플루언서’가 쓴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여태까지 본 페미니즘 서적에서 본 이런저런 이슈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어서, 페미니즘이 뭔지 이제 막 발을 담가 보려는 사람들이 읽어도 딱 좋을 듯.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라서 글도 쉽게 잘 썼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독일이 젠더 문제에서 이 정도 수준이면 우리나라는…’ 하는 거였다. 2023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출처), 독일은 세계에서 6위였고 우리나라는 105위였다. 유럽 내에서도 꽤 진보적이라는 독일이 이 정도면 우리나라는 거의 뭐 절벽 수준이지^^… 독일에서도 여성들이 이렇게 대차게 페미니즘을 위해 움직이고 있구나. 얼마 전에 보니까 대한민국의 페미니즘도 스타성이 미쳤던데(참고) 한국 페미니즘 서적이 독일에 소개되는 날도 오겠지? 아니, 벌써 있으려나?
그건 그렇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페미니즘 서적에서도 많이 보는 표현들, 예컨대 ‘픽미걸(pick me girl)’이라든가 ‘남성의 시선(male gaze)’, ‘캔슬 컬처(cancel culture)’ 등의 용어가 나오는 데 놀랐다. 독일도 미국 문화가 널리 받아들여져서 아무래도 이런 용어를 받아들여 쓴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여성 혐오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게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란해졌달까.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충격적인 부분을 뽑아 보면 단연코 ‘허스번드 스티치(husband stich)’의 존재를 알게 된 바로 이 부분이다. 출산할 때 아기 머리가 좀 수월하게 나오도록 회음부를 조금 찢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걸 다시 꿰맬 때 필요 이상으로 한 바늘 더 꿰매서 ‘타이트하게’ 만든다는 게 무슨 짓인가. 이걸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는지 검색해 봤는데 딱히 관련된 기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볼 수도 없고…. 그냥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역겹고 충격적이다.
이처럼 의학 연구에서 여성의 신체는 남성의 신체보다 뒷전이며, 충돌 테스트와 같은 안전성 검사도 대개 남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한다. 심지어 수술을 앞둔 여성의 신체에 관해서도 남성의 기준이 우선시 될 때도 있다. 그 예시가 ‘허즈번드 스티치Husband stitch’다. 여성이 자연분만 할 때 회음부가 찢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래서 출산 직후 여성의 회음부를 봉합해야 하는데 의사들이 남편을 위해 본래 필요한 만큼보다 한 땀 더 봉합한다고 하여 허즈번드 스티치란다. 놀랍게도 허즈번드 스티치는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상상해 보라. 당신은 남편과 아이를 만들었고, 비로소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을 출산을 지금 막 해냈다. 그런데 의사가 다가와 남편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회음부를 더 좁게 꿰맬 것인지 물어본다. 내 몸은 너덜너덜해졌는데 “우리 남자들끼리는 알잖아요. 더 나은 성생활을 즐기세요”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니, 정말 사양한다. 내가 처음 허즈번드 스티치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는 도대체 내가 뭐를 읽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진짜 이딴 게 있다고?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허즈번드 스티치를 받은 여성은 이후 몇 개월에서 몇 년 동안 성관계를 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왜냐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질이 좁게 꿰매졌기 때문이다. 그게 남편에게 주는 의사의 선물이라니, 참 대단한 의술이다.
참고로 이 인용문 바로 앞에 나온, ‘의학에 깃든 여성에 대한 편견‘, 즉 예를 들어 여성과 남성의 심장마비 전조 증상이 다른데도 남성 기준이 널리 알려진 탓에 여성 응급 환자가 남성 응급 환자보다 평균 30분은 늦게 병원에 도착한다거나, 남성 위주로 진행되는 임상시험 결과를 가지고 제조된 의약품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처방된다는 점 등에 대해 더 읽어 보고 싶다면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추천한다.
전반적으로 평하자면, 인플루언서답게 쉽고 술술 읽히게 잘 쓴 페미니즘 책이다.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 마시라. 저자 타라-루이제 비트베어는 무려 문화학을 전공한 지성인이니까. 이 책을 아무 생각 없는 인플루언서가 돈을 벌기 위해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여성 혐오의 또 다른 모습이고, 전혀 틀린 추측이다. ‘여성 인플루언서’는 쉽게 돈을 번다는 여성 혐오적 착각을 지적하는 문단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영국 일간지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는 “여성의 소득이 남성보다 높은 유일한 산업”이라는 제목으로 여성 인플루언서의 수익에 대한 기사를 발표한 적 있다.54 이 제목은 ‘감히 어떻게 여성이 남성보다 많이 벌 수 있어?’로 들린다. 이 말인즉슨 대부분의 직종에서 남성의 평균 소득이 여성의 평균 소득보다 높다는 말 아닌가?
2020년 기준, 앞으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독일에서 성별 간 임금 격차가 사라지기까지 101년이 걸린다고 한다.55 무려 101년이다! 101이라는 숫자는 작은 달마티안 강아지가 잔뜩 등장하는 디즈니 영화 제목이 아니라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씁쓸한 현실이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입이 더 적은 진짜 현실말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플루언서는 처음부터 여성의 수입이 남성의 수입보다 많은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사례로 비쳐진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여성 인플루언서가 광고하는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곧 여성 인플루언서의 실제 수입이 남성보다 높다는 말은 아니지 않을까? 이 주제에 대한 자료와 기사를 더 찾아보니 추측이 맞았다. 실제로 인플루언서 중에는 여성의 비율이 높아 온라인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셜 미디어에서 남성들이 광고나 홍보 활동으로 받는 돈은 여성들이 받는 돈보다 많다. 남성 인플루언서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팔로워 수와 파급력이 비슷한 여성 인플루언서 대비 약 7퍼센트를 더 받는다고 한다. 독일 일간지 《타게스슈피겔》 요아힘 후버Joachim Huber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포스팅, 스토리, 영상까지 합치자 인플루언서의 성별 간 임금 격차는 무려 49퍼센트에 달한다. 남성 인플루언서가 4,042달러를 벌 때 여성 인플루언서의 수입은 고작 2,704달러에 불과했다.
마치 뺨이라도 맞은 듯한 모욕적인 기분이다. 이건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존재감을 만들어내고 특별한 콘텐츠로 시선을 사로잡는 창의적인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럼 그렇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별 간의 임금 격차가 나를 배신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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