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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메리 앤 시그하트, <평등하다는 착각>

by Jaime Chung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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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메리 앤 시그하트, <평등하다는 착각>

 

 

나는 어릴 적에 <해리 포터> 시리즈를 참 좋아해서 조앤 K. 롤링의 성공에 관한 책도 읽었다. 지금 그 책의 내용 대부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부분이 있다. 롤링의 <해리 포터>를 출판하기로 한 출판사에서 그녀에게 ‘작가가 여자 이름이면 남자애들이 책을 읽어 보지도 않을 테니,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이니셜을 사용하자’라고 제안했다는 것. 실제로 <해리 포터> 시리즈는 J. K. 롤링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됐고,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책 자체도 대박,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온갖 다양한 사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느냐면, 조앤 롤링처럼 대단한 작가도 ‘여자 작가가 쓴 책은 읽지 않는다’라는 지긋지긋한 성 고정관념 때문에 자기 이름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이니셜을 써서 ‘남자인 척’해야 했다는 일화가 이 책에서 말하는 ‘권위 격차’를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평등하다는 착각>의 저자 메리 앤 시그하트는 <더 타임스>에서 20년간 근무해 온 정치부 기자로, 남녀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인식되는 데에는 ‘권위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내가 방금 든 조앤 롤링의 예시 외에도 이런 경험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저자도 20년차 잔뼈가 굵은 정치부 기자인데, 기자들이나 관련 업계인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저자보다 다른 남자 기자가 정치에 관한 질문을 더 많이 받는다고 했다. 여자는 정치를 모를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저자는 ‘권위 격차’를 드러내는 아주 단적인 예시를 들며 책을 시작한다. 메리 매컬리스는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아일랜드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기 위해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매컬리스가 사절단 맨 앞자리에서 교황에게 소개되려는 순간, 교황은 그녀를 휙 지나치더니 그녀의 남편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대통령의 남편이 되느니 차라리 대통령이 되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이 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나누는 중에 매컬리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공중에서 머뭇거리던 교황의 손을 잡고 말했어요. ‘안녕하세요. 아일랜드 국민이 뽑은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입니다. 교황님이 보시기에 좋든 싫든 말이죠.’”

물론 교황은 이게 ‘농담’이었다고 둘러댔다. 남성 대통령이었다면 듣지 않았을 농담을, 왜 여성 대통령은 들어야 하는가? 그가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은 남성만큼 권위를 갖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분야에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라도 그렇다. 이런 남녀간의 ‘권위 격차’를 가장 분명하게 느낀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들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각각 남성에서 여성으로, 그리고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 전환 한 이들의 말을 인용해 이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한 남성이 상사가 무능한 변호사인 수잔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훨씬 능력 있고 유쾌한 ‘남성’ 변호사를 신입으로 고용했다며 상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여기서 핵심은 수잔과 신입 변호사가 동일인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포틀랜드주립 대학교의 사회학자 미리암 에이벨슨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 남성 66명을 인터뷰하면서 수집한 일화 중 하나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 트랜스 남성들은 남성이 된 후 전보다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았고, 더 존중받았으며, 권위를 의심받는 횟수가 줄었다고 했다.

에이벨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나와 인터뷰한 대다수 트랜스 남성에게는 성차별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시카고대학교의 크리스틴 쉴트는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했다. 이 연구를 통해 트랜스 여성은 성전환 이후 보수가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반면 트랜스 남성은 보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쉴트와 인터뷰한어느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 된 후 회의에서 의견을 낼 때마다 모든 참석자가 그의 의견을 받아 적는다고 말했다.

“여성이었을 때는 아무리 많은 근거를 대도 틀림없는 사실이냐고 의심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 주장을 굳이 뒷받침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 희한해요.”

또 다른 트랜스남성은 이런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너무공격적이라고 지적받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책임감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요.”

쉴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트랜스 남성이 ‘남성’이 된 후 확실히 알아차리게 되는 사실이 있어요. 바로 직장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성공하는 까닭은 남성의 기술이나 능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성 편향으로 인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라는 점이에요.”

이들이 인터뷰한 트랜스젠더는 오직 성(性)을 바꾸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거 참 나, 권위를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 당장 내가 성 전환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이 사회가, 우리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 안에도 잘못된, 성차별적 편향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 편견이고 바뀔 수 있다. 나는 저자가 4장의 소제목을 ‘성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고 지은 게 참 마음에 드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회가 여성을 앞으로 더 존중한다고 해서 남성들이 무엇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도 그로 인해 혜택을 본다.

수많은 연구가 입을 모아 부부가 동등한 관계를 맺고 가사와 육아를 공평하게 분담할 때 남편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혜택을 누린다고 말했다. 부부 사이에 소통이 잘 됐고, 부부 관계에 대한 아내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며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으며, 가사나 육아를 더 많이 감당하면서 원망이 쌓이거나 기력이 소진되는 일도 적었다. 그 결과 아내는 더 행복하고 건강해졌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성평등 가정의 아이들은 문제 행동을 덜 보이고 학교생활을 잘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 자신이 더 행복하고 건강해졌다. 성평등 가정을 이룬 남성은 자기 삶에 만족할 가능성이 두 배 더 높고 음주와 흡연, 약물 복용을 덜 했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덜 겪었고, 이혼할 확률이 낮았으며, 아이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성관계를 훨씬 더 자주, 더 만족스럽게 누렸다. 이런 마당에 성평등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사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도 불리해요. 남성 중에도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공격적인 지도자 유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우두머리 수컷은 암컷뿐 아니라 다른 수컷도 괴롭히거든요.”

노르웨이의 사회학자 외스테인 훌터는 「남성에게 무슨 득이 된다는 거지?(What’s in It for Men?)」라는 제목의 훌륭한 논문에서 성평등 수준이 높은 유럽 국가 그리고 미국의 주에서 남성이 누리는 혜택을 열거했다. 성평등 지역에 사는 남성은 이혼율이 낮았고, 폭력 사건에 의한 사망률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남성 자살률과 여성 자살률의 격차가 적었다. 더불어 배우자나 자녀를 폭행할 가능성도 낮았는데, 이는 자녀가 성장한 뒤 폭력을 저지를 위험도 줄여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들의 행복도가 더 높았다.

“성평등 수준이 높아지면 여성은 혜택과 특권을 누리지만 남성은 지금껏 누리던 혜택과 특권을 빼앗긴다는 것이 가장 흔한 오해예요.”

홀터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성평등 수준이 높은 지역에 사는 남성은 다른 지역의 남성에 비해 행복할 가능성이 두 배 높았고, 우울할 가능성은 절반 밖에 안 됐다. 이 효과는 계층이나 소득 수준과는 관계없었다.

그러니 ‘알파 메일’이니 ‘베타’니 뭐니 하면서 여자들을 모든 남자들에게 한 명씩 배급해 달라는 헛소리 대신, 자기 정신머리를 고쳐서 여성들을 존중하는 게 남자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이득이다.

 

이쯤 되면 여러분들은 ‘그렇지만 ‘권위 격차’를 내가 당장 어떻게 줄이나요?’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그런 질문을 할 이들을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는 데 마지막 한 장을 통째로 할애한다. 다양한 입장,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액션들을, 순서를 매기지 않은 목록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진보적이고 똑똑한 사람도 여성, 유색인, 다른 계층, 다른 나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무의식적 편향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 무의식적 편향은 멈추거나 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편향되어 있다고 수치심을 느낄 필요 없다. 그러나 편향이 잘못된 가정에 바탕을 둔다는 점을 알아차리면 고칠 수 있다.

◦ 처음 만나는 여성의 능력, 매력, 지식 수준이 남성보다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지 않는다. 여성의 능력을 평가할 때는 남성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댈지 자문한다.

◦ 여성이 남성만큼 유능하고 권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 여성의 말을 남성의 말처럼 적극 경청한다.

◦ 여성이 발언할 때 말허리를 끊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개인, 배우자, 부모, 직장 동료, 고용주, 교사, 언론, 정부,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소한 8개 항목 이상) 쭉 나열하는데, 이것만 보고 배워도 사회가 더 좋은 곳이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구체적이고 곧장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까지 떠먹여 주는데, 몰라서 못 한다는 개소리는 이제 못하겠지.

 

정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단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어째서인지 내가 본 이북 버전에는 누가 봐도 오타인 게 분명한 (예를 들어 ‘이 틀을석기시대로부터’) 띄어쓰기 오류가 많았다(참고로 나는 예스24의 크레마 클럽을 이용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서 반복적으로 수없이 등장해서, 조판을 짜다가 무슨 오류가 났나 싶었다. 이건 개인이 뭘 몰라서 틀린 게 아니라 이북 만드는 과정에서 뭔가가 잘못된 듯. 혹시나 해서 알라딘에서 ‘미리보기’를 해 봤더니 내가 본 이북에서는 이상하게 잘못된 것들이 ‘미리보기’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알라딘 ‘미리보기’는 종이책을 스캔한 거니까 종이책은 이런 조판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왜 내가 본 이북만 그랬을까… 어쨌거나 그 점을 제외한다면 번역도 어색하지 않고 무난했으며, 책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단연코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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