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Farewell(페어웰, 2019) - 할머니를 위한 모두의 거짓말
감독: 룰루 왕(Lulu Wang)
빌리(Billi, 아콰피나 분)는 6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중국계 미국인이다.
어릴 때는 피아노도 좀 쳤는데 지금은 친구네 어머니에게 세를 얻어서 살면서 일자리가 없어 렌트도 못 내고 있다.
그래도 중국에 계신 할머니 나이 나이(Nai Nai, 슈젠 자오 분)를 사랑하는 마음은 끔찍해서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자주 하는데, 어느 날 할머니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리고 부모님도 최근 표정이 어두운 것이 뭔가 문제가 있는가 싶다.
알아 보니, 할머니는 최근에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셔서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빌리의 친척인 하오하오(Hao Hao, 한 첸 분)가 사귀기 시작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일본인 여자 친구랑 급히 결혼식을 올린다고. 당장 내일 부모님은 출국에 결혼식에 참석 겸 할머니를 뵙고 올 거란다.
그걸 이제야 말씀하시면 어떡하느냐고 빌리가 부모님에게 따지자 부모님은 '너는 원체 감정적인 데다가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일부러 말 안 했다. 할머니도 당신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모르시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을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결국 빌리의 부모님은 홀로 미국에 남은 빌리. 얼마간 친구도 만나고 뉴욕 거리도 거닐어 보지만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결국 빌리는 어찌저찌 비행기표를 사서 그리운 할머니에게도 찾아간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손녀딸을 반겨 주시지만, 빌리는 정말 할머니에게 진실을 알려드리지 않는 게 옳은 일인지 내내 갈등한다.
감독 룰루 왕네 가족에게 일어났던 실제 일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영화 시작할 때 "Based on an actual lie(실제로 일어났던 거짓말에 기반하였음)"라는 자막이 뜬다.
정말로 룰루 왕네 가족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할머니께 이 사실을 숨겼는데, 이 감독이 이 일화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 제작 과정에서도 그걸 숨기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결국에는 실화의 주인공 할머니의 친구 되시는 분이 영화 리뷰를 보고 이야기를 꺼내서 할머니도 마침내 알게 되셨다고).
살면서 한 번쯤 접하거나 최소한 상상을 해 볼 만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라서 흥미로웠다. 물론 이 주제에 대해 동서양의 대체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것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앞으로 곧 죽을 거라면, 그리고 내가 그걸 알고 있다면, 본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할까?
죽기 전 삶을 마무리할 시간이라는 게 정말로 필요할까?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도 모르는 게 나을까?
사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루를 살아가지 않나.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건 정말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나 그들 주변의 사람들뿐.
하지만 사람 목숨이라는 게, 오늘 너무나 건강해도 내일 갑자기 사고에 연루되어 죽을 수도 있는 것인데...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로 매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이런저런 조건들, 예컨대 행복하려면 돈이 많아야 해, 전셋집에 살면 행복할 수 없어, 애인이 없으면 불행한 거야, 같은 조건들을 떨쳐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말 죽음이 눈앞에 있다면 그런 것들은 너무나 미미해 보일 테니.
나는 아콰피나를 <Crazy Rich Asians(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2018)이랑 <Ocean's 8(오션스8, 2018)>을 통해 처음 만나서 코믹한 배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보니 진지한 정극 연기도 괜찮았다(내가 남의 연기를 판단할 수준은 아니지만).
아콰피나 본인의 중국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극 중에서는 이민 2세답게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하고(일부 표현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부모님께 물어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또한 아예 한자는 못 읽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해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기도 한다(할머니의 진단서가 나왔는데 못 읽는다든가, 할머니랑 통화할 때 나오는 병원 방송을 못 알아듣는다든가).
이러한 점이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가운데 끼어 있는 이민 2세의 처지를 잘 보여 주기도 하고.
나는 특히 할머니가 빌리네 가족을 공항으로 떠나 보낼 때 빌리를 살짝 밀면서 빨리 가라고, 이 슬픔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만들지 말라고 하는 부분이 제일 뭉클했다. 손녀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계속 붙잡을 수는 없고...
이건 삶에 치환해서 읽어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평생 함께할 정도로 오래 살 수는 없으니까.
오버스러운 면이 없어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좋은 영화였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