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Words on Bathroom Walls(2020, 비밀이 아닌 이야기) - 정신병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미래를 위하여
감독: 쏘어 프류덴탈(Thor Freudenthal)
아담(Adam, 찰리 플러머 분)은 평범한 고등학생 같아 보이지만 사실 비밀이 하나 있다. 10대 중반에 벌써 조현병이 발병했다는 것. 그래서 현실에 없는 목소리를 보고 현실에 없는 것들을 본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하필 과학 실험 중에 어둠의 목소리가 들려서 두려워하다가 실수로 비커를 쳐서 그나마 하나 있던 친구의 팔에 화상을 입혔고, 정신병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아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이 유일하게 머릿속 목소리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은 요리할 때뿐인데, 그래서 그는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고 꿈도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유명 레스토랑도 다니며 이런저런 요리도 맛보고, 혼자 열심히 요리도 배우고 실험해 본 그가 인생에서 단 한 가지 기대하고 바라는 게 있다면 요리 학교에 진학하는 것.
그러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아담의 엄마 베스(Beth, 몰리 파커 분)는 '성 아가사(St. Agatha)' 학교를 찾아냈다.
성 아가사 학교의 교장인 캐서린 수녀님(Sister Catherine, 베스 그랜트 분)은 아담의 전학을 허가하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정신병 치료 과정을 매달 학교와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현재 조현병 때문에 시도해 보고 있는 새로운 임상 실험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학교로서는 학생이 정신병 때문에 사고를 일으킬 위험성을 감수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시작하게 된 성 아가사 학교에서 아담은 똑똑할 뿐 아니라 다양한 부의 주장으로 활동하고, 또한 선생님들 몰래 학생들 숙제를 도와주는 '부업'을 하는 소녀, 마야(Maya, 테일러 러셀 분)를 만나게 되는데...
줄리아 월튼(Julia Walton)의 영 어덜트(young adult, 주로 12-18세의 청소년을 말함)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다운 받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마존 프라임에 올라와 있길래 그걸로 봤다.
원작 소설도 현재 읽는 중이니 이에 대한 리뷰도 조만간 올리겠다(간단히 요약하자면 영화와 책은 다른 점이 많다).
정신병을 가진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의미 있고 좋은 것 같다.
특히 조현병이라는 게 대중적으로 이미지도 좋지 않은데, 그런 오명을 벗기고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과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다. 그런 데에 이런 작품들이 도움이 되는 거고.
아담이 보는 '환영'은 크게 네 개인데, 그중 셋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검고 짙은 안개, 어둠의 형태로 아담을 괴롭힌다.
다른 셋은 각각 레베카, 보디가드, 호아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등장하는 순간은 레베카가 제일 먼저니까 레베카(Rebecca, 안나소피아 롭 분)부터 소개하자면, 아담이 보는 환영 중 제일 '젠(zen)'하고 차분하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이다.
보통 아담이 긴장하거나 흥분할 때 이를 진정시켜 주는 다정한 말을 건넨다.
두 번째는 보디가드(Bodyguard, 로보 세바스찬 분). 아담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환영이 아닌가 싶다.
조금이라도 아담에게 상처를 줄 것 같은 사람은 저 야구 배트로 다 때려 죽여 버리겠다고, 말 한마디만 하라고 할 정도로 폭력적이지만 아담에게는 충성스럽다.
마지막으로 호아킨(Joaquin, 데본 보스틱 분)은, 아담의 표현을 빌리자면, 90년대 로맨틱 코미디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일 법한, 호색한 캐릭터.
편한 옷차림에서 알 수 있듯이 느긋하고 능글맞으며, 여자에게 관심이 많다. 마야와 잘될 것 같을 때 끼어드는 모습이 너무 귀여움ㅋㅋㅋ
아담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려면 꼭 성 아가사 학교를 무사히 견디고 졸업장을 따야 하는데, 학교 선생님인 캐서린 수녀님조차 아담을 못마땅해한다. 정확히는 그의 정신병을 못마땅해한다.
카톨릭계 재단인 학교인데, 그러면 더 포용력을 발휘해 모든 학생들을 감싸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학기 중간에 갑자기 이전 학교를 관둔 학생을 받아 주겠다는 곳이 드물어서 여기까지 가게 되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사실, 캐서린 수녀의 그런 태도가 정신병이라고 하면 무섭다고 생각하고 피하려는 대중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만 않긴 하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소설에는 이 성 아가사 학교가 폴, 그러니까 아담의 엄마인 베스의 새 남자 친구이자 아담에게는 새아빠인 폴(Paul, 월튼 고긴스 분)의 모교라고 나온다.)
아담이 마야와 가까워질수록, 그녀에게 더 빠져들수록 자신에게는 정신병이 있고 환영이 보이며 환청을 듣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더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간 버림받을 거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도 아담이 해야만 하는 성장 과정의 일부이다.
영화는 그걸 잘 담아냈다.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아담은 무사히 그 공포를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왜 아담이 요리를 할 때면 환영도 잦아들고 편안해질까 생각해 봤는데, 요리라는 게 현실에 집중해야 하는 행위라서 그런 것 같다.
요리란 자고로 자신의 감각을 온전히 믿고 사용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게 뜨거운가, 차가운가, 이 맛이 단가, 짠가, 소스가 붉은가, 흰가 등등, 자신의 감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떤 재료가 없을 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있어도, 요리에 아예 넣지 않은 재료의 맛을 느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니까.
그래서 감각과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요리를 할 때 아담은 자신의 병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아담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름대로 풋풋한 연애도 하고, 엄마와 새아빠와의 관계도 개선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힘이 난다.
성장 소설/영화는 이런 재미로 읽고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ㅎㅎ 정말 오랜만에 IMDB에서 평점 높은 (이 포스트를 쓰는 2022년 1월 19일 기준 7.2점) 영화를 본 것도 너무 좋다. 이 정도면 완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