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Inventor: Out for Blood in Silicon Valley(2019, 디 인벤터: 아웃 포 블러드 인 실리콘 밸리) - 대사기극의 실체가 밝혀지다
감독: 알렉스 기브니(Alex Gibney)
19살의 스탠포드 대학교 중퇴자, 엘리자베스 홈즈(Elizabeth Holmes). 그녀는 소량의 피로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기계, '에디슨(Edison)'을 발명하고 이것을 통해 모든 이들이 쉽고 값싸게 질병을 미리 확인해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렇게 세운 회삭 바로 '테라노스(Theranos)'. 젊은 천재의 등장에 미국, 특히 실리콘 밸리는 흥분으로 들끓는다.
테라노스는 쟁쟁한 이사회 임원들을 내세워 신뢰를 얻고 투자금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이 '에디슨'이란 기계는 홈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잘 작동하지 않았다.
감독은 충격적인 이 사기극의 진실을 밝힌 기자 '존 캐리루(John Carreyrou)'와 양심 고발자들을 인터뷰하며 이 사건을 들여다본다.
미국 전역을 속인 '테라노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며칠 전에 빈지(Binge)라는 호주 OTT 플랫폼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거기에 이 다큐가 있길래 보게 됐다.
'테라노스' 사건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찾아볼 수 있고(나도 그런 글들을 통해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미 존 캐리루의 책 <배드 블러드>도 번역 정발되어 있는 데다가(나도 곧 읽어 볼 예정이다), 나무위키(https://namu.wiki/w/%ED%85%8C%EB%9D%BC%EB%85%B8%EC%8A%A4%20%EC%82%AC%EA%B1%B4)에도 이에도 이 사건에 대해 잘 서술된 항목이 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이 다큐를 보면서 느낀 점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홈즈는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기계에 '에디슨'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감독이 지적하듯 이는 참 의미심장하다.
에디슨만큼 기업가스러운, 다시 말해 제품이나 자기 자신이 실제보다 더 있어 보이게 만들 줄 알았던 발명가가 또 있을까?
에디슨이 했다는 그 유명한 말, 자신은 전구를 발명하는 데 1,000번 실패한 게 아니라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1,000가지 방법을 배웠을 뿐이라는 말을 아마 홈즈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는 그냥 이게 작동하지 않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고, 성공할 때까지 믿고 되는 척하면("fake it till you make it") 결국엔 정말로 될 거라고.
자신이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계속 노력하는 건 멋진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안 되는 걸 된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 그로 인해 돈까지 얻어 냈다면 이는 단연코 사기이다.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다큐에 나오는 테라노스의 전경과 내부 모습 등은 모두 테라노스 공식 홍보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외에 뉴스나 TV 쇼 등 미디어에 출연한 모습 등도 있고.
그런데 어쩜 정말 홈즈는 한결같이 눈을 놀란 듯이 크게 뜨고 또 눈을 잘 깜박이지 않는지 소름끼치게 무섭다. 약간 사람이 아닌 것을 보는 느낌.
스티브 잡스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해서 따라 하려고 검은색 옷만 줄창 입고, 목소리도 좀 권위적으로 들리려고 일부러 낮게 까는데 진짜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뭔가 홀리는 느낌을 주는 듯도 하지만... 여튼 이자는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 교주 같은 걸 했을지도 모르겠다.
양심 고발자들 중 하나인 타일러 슐츠(Tyler Schultz)는 이사회 임원 중 한 명이었던 조지 슐츠(George Schultz)라는 경제학자 겸 외교관 겸 사업가의 손자이다.
홈즈와는 가족의 친구처럼 알고 지냈고 마치 손녀처럼 친하게 지냈다는데, 자기 손자가 '테라노스'의 실체를 알게 되어 이를 고발하려는데 손자 말보다 (따지고 보면 남남인) 홈즈 말을 더 믿었다는 게 진짜...
나라면 할아버지에게 엄청 실망하고 슬펐을 듯. 타일러 슐츠는 양심 고발을 하고 나서 테라노스 측으로부터 보복성 협박을 듣게 된다.
다른 양심 고발자들 중 하나인 에리카 층(Erika Cheung)도 비슷한 협박을 받았는데, 이사 가서 임시로 지내던 거주지, 정말 아무도 모르던 거주지 앞으로 쓰인 편지를 받았단다.
기밀 문서 뫄뫄뫄를 테라노스에게 반환하지 않으면 고소당할 수도 있다는 내용. 보낸 사람은 무려 데이비드 보이스(David Bois), 어마어마하게 이름 높은 변호사였다.
이 사람의 업적도 쟁쟁한데 (당시) 23살짜리에게 그런 협박성 편지나 보내다니, 정말 졸렬하고 치졸하기가 짝이 없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난 홈즈가 무엇보다 이 실리콘 밸리, 과학, 테크 업계에서 드문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했다는 게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양심 고발자 에리카 층도 처음에는 같은 과학, 테크계에서 이렇게나 눈에 두드러지게 뜨이는 여성을 알게 되고 그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이 큰 존경심과 놀라움을 느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자신의 그 거짓말로 얼마나 많은 '멀쩡한' 단체들에 끼어들어 그 명성에 누를 끼쳤을 것인가, 그런 점을 고려해 보면 진짜 너무 나빴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안 그래도 소수자, 약자에 속하는 여성의 입지를 더욱 더 좁게 만들 셈인가. 진짜 너무너무 답답하고 억울하다.
처음에 홈즈를 인터뷰해 <포춘(Fortune)>지에 올렸던 기자 로저 팔로프(Roger Parloff)도 이 다큐에 등장하는데, 참 안타깝더라.
홈즈가 한 말을 무작정 받아적는 식으로 저널리즘 정신이 없는 기자도 아니었고, 홈즈에게 '에디슨'의 원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내려고 애썼던 기자인데, 캐리루가 쓴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기사를 읽고는 자신이 이런 사기꾼을 위한 기사를 썼구나, 하고 자괴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홈즈가 어떻게 자신을 고의로 속였는지("misled")에 대한 기사까지 썼는데, 홈즈는 또 그것도 부정했다고 한다.
진짜 사기꾼 하나 때문에 이 긍지 높은 기자의 자존심도 땅에 떨어지고, 많은 이들이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고, 또 일반 고객들은 혼란을 겪었으니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에휴...
이 흥미로운 사기극을 할리우드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홈즈 역으로 분한 TV 미니 시리즈 '드롭아웃(The Droput)'은 훌루(Hulu)에서 공개되었고, 아담 맥케이 감독은 이를 <배드 블러드(Bad Blood)>라는 제목으로 이를 극화해 준비 중인 걸로 알려져 있다(홈즈 역은 제니퍼 로렌스).
정말 이게 만화나 영화, 소설이었으면 설정이 뭐 이딴 식이냐고 엄청 까였을 텐데, 실화라니 역시 언제나 현실이 허구보다 더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경제 심리학> 책으로만 뵈던 분인데 여기 다큐에서 인터뷰이로 보니 반가웠다 ㅎㅎㅎ
'테라노스' 사건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이것만으로 사건의 모든 면을 다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다큐는 이 사건을 꽤 잘 살펴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2019년 당시에는 아직 이 사건이 법정에서 마무리가 안 되어서 에필로그가 좀 초라하긴 하지만.
가장 최근 소식에 따르면 홈즈는 올해 (2022년) 1월 4일에 투자자들을 사취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고 올해 9월 26일에 실질적으로 형이 집행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9월 26일에 감방에 간다는 뜻이다.
존 캐리루의 <월 스트리트 저널> 기사가 나간 게 2015년 후반(10월)인데 이제야 유죄 선고가 정식으로 나다니 정말 지난한 세월...
어쨌거나 흥미롭고 정말 볼만한 다큐멘터리이다. '드롭아웃'이나 '배드 블러드' 보시기 전에 예습 느낌으로 사건 이해를 위해 보셔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