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추천]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나는 본격 SF 소설을 읽으면 처음엔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대개 SF에는 우주, 로켓, 로봇 등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내가 모르는 분야(예를 들어 우주선 내부)의 장면을 묘사하면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곤혹스럽다.
뒤로 가면서 이야기 자체의 매력에 빠져 소설 읽는 게 익숙하고 즐거워지긴 해도, 내가 잘 모르고 솔직히 크게 관심도 없는 분야를 마주하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저 빨리 등장인물들과 줄거리를 파악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런데 테드 창의 단편을 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런 당혹감이 들지 않았다.
보통 SF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런 것들(위에서 말한 우주, 로켓, 로봇 등)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SF라고 할까, 나는 이 책이 다소 판타지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웠던 몇 편('이해', '영으로 나누면', '인류 과학의 진화')을 제외하면 모두 다 재미있었고 기발함에 감탄했다.
단편들 중 인상 깊었던 몇 편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 <컨택트(Arrival, 2016)>의 원작 소설이다. 사실 이거 때문에 읽기 시작한 건데 나는 아직 안 봤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발이 일곱 개라 '헵타포드'라고 부른다)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소집된 언어학자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딸에게 말을 거는 내러티브가 교차하는 소설이다.
화자가 '세월의 책'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간단히 말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을, 그러나 젊은 나이에 죽게 될 딸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어떻게 하나로 엮어 낼 생각을 했는지가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내에 딱히 이렇다 할 갈등 상황이 없는데 어떻게 영화화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미래에 화자의 딸에게 일어날 일을 안다는 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고 싶다.
두 번째, '지옥은 신의 부재'. 천사(그리고 때때로 악마)가 이 인간계에 종종 강림하고 그 출현이 산사태나 지진처럼 집계된다는 설정의 이야기이다.
천사가 나타나면 거의 매번 피해자가 나오는데, 부상을 당하거나 죽고 천상의 광휘에 눈이 타 아예 애초에 눈이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게 된다.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천사를 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낫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해 천사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타고나기를 다리가 없는 한 남자이다.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던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서 어떻게든 그녀를 사후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사그라져 버린 신에 대한 믿음을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천사를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천사를 따라다니게 되는 이야기이다. 결말이 충격적이다.
책 말미에 수록된 창작 노트에서 저자는 이 단편이 <욥기>에서 불만스러웠던 점을 보충한 이야기라고 썼다.
세 번째는 맨 마지막에 실린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이다.
실제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용을 글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식도 신선하고, '타인과 본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미적 감각'을 차단하는 간단한 시술('칼리아그노시아', 줄여서 '칼리'라고 부른다)을 한 대학교 학생들에게 강제해야 하느냐에 대한 찬반 논의가 그 '인터뷰'의 내용이다.
인터뷰 대상 중 한 명인 타메라는 이 시술이 의무인 고등학교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해 '칼리'를 끈다. 즉, 다시 타인을 보고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예쁜지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룸메이트 아이나는 타메라의 고교 시절 남자 친구 사진을 보며, "걔 같은 애가 널 만났다고?" 하며 놀란다. 사실 타메라는 예쁘고 개럿(구 남친 이름)은 못생겼던 것.
타메라는 개럿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자기와 잘 맞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었던 것인데, 그녀의 말을 듣고는 '미(美)'가 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개럿이 자신처럼 '칼리'를 꺼서 자신과 남의 외모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조금은 자신에게 더 잘해 주기를, 매달려 주기를 바라며 그와 다시 사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이 단편은 '미'가 가지는 특권과 그걸 가진 사람의 심리를 잘 꼬집어서 무척 감탄했다. 과연 이 멋진 단편집을 끝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막힌 엔딩이다.
이 외에도 바벨 탑의 끝까지 올라가 보는 이야기 '바빌론의 탑'과 작명을 통해 일종의 전자동 로봇을 만들어 내고 나아가 인간의 대를 이어나가는 연구에 관한 이야기 '일흔두 글자'도 아주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책이 번역도 괜찮고, 오탈자도 크게 눈에 거슬리는 부분 없이 교정교열도 잘되어 있다.
SF나 판타지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개선할 수 있는(아니면 최소한 우리가 대리 만족을 할 수 있는) 방향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거기에서 재미라면 재미, 통찰이라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어쨌든 출간 예정이라는 테드 창의 또 다른 단편집이 기대된다. 얼른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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