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Love, Lizzo(러브, 리조)>(2022)
⚠️ 아래 글에서 ‘뚱뚱하다’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몸에 살이 많다는 뜻일 뿐, 이에 대해 그 어떤 도덕적이나 미학적 판단도 들어가 있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제 블로그는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와 자기 몸 중립성(body neutrality)을 지향합니다.
<Love, Lizzo>는 리조(Lizzo)의 성공과 음악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리조의 짱팬인 나는 이게 빈지(Binge)에 있길래 한번 봤다(리조가 누군지 잘 모르신다면 아래 내가 쓴 리조의 음악 추천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https://blog.naver.com/eatsleepandread/222949441104
‘원래 이런 거 팬만 보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그런 식으로 치면 정치인들 자서전은 일반 대중이 읽어서 출판하는 건가? 당연히 아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인물도 적당히 각색해서 ‘예쁜’ 전기 영화로 만드는 판에 리조가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지 못할 이유가 뭔가(참고로 내가 그를 싫어하는 세가지 이유 간단 정리: 1️⃣ 미성년자들을 건드렸다. 엘비스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된) 프리실라를 그녀가 고작 14살일 때 처음 만나 계속 그루밍했다. 2️⃣ 흑인 음악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훔쳐 썼다. 일례로, ‘Hound Dog’는 흑인 가수 엘리 메이 ‘빅 마마’ 쏜튼이 먼저 불렀고, 4년 후 그가 커버했다. 3️⃣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다리를 후들후들 하는 춤이 너무 꼴 뵈기 싫다.) 리조가 뭐 범죄자도 아닌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참 부러웠다.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정립하고 또 그걸로 성공한 것도 부럽지만, 1️⃣ 뚱뚱한 2️⃣ 흑인 3️⃣ 여성이라는, 세 가지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공해 자신과 같은 이들을 이끌어 준다는 게 진짜 너무 멋지고 부러웠다. 리조는 ‘빅 걸스(Big Grrrls)’라 불리는 댄스 크루도 데리고 있는데 모두 그녀처럼 뚱뚱한 흑인 여성 댄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빅 걸스는 리조의 공연을 더욱 풍부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주는 조연들이다. 그리고 리조는 이 빅 걸스 댄스 크루에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Lizzo’s Watch Out for the Big Grrls>라는 경연 프로그램도 만들었다(아마존 프라임에서 시청 가능). 뚱뚱한 흑인 여성 댄서들이 크루에 합류하기 위해 춤으로 경연하는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은 2022년에 뛰어난 경연 프로그램(Outstanding Competition Program) 부문 에미상을 받았다.
에미상 수상 소감 때 리조는 어렸을 때 미디어에서 자신을 닮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처럼 뚱뚱하고, 자신처럼 흑인이며, 자신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만약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어린 리조에게 한마디를 해 준다면, “넌 그런 사람을 보게 될 거야. 근데 그건 너여야만 해.”라고 말해 줄 거라고도 말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이제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공과 돈, 영향력을 갖게 된 지금 그대로 창조해 낸다는 게 정말 어마어마하게 대단하다. 그리고 또 자신 같은 뚱뚱한 흑인 여성들의 모습을 미디어에 많이 노출시키고자 자신이 가진 자원을 써서 그들을 이끌어 준다는 게 또 얼마나 멋진지. 아래 2020년 그래미에서 한 리조의 공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무대에 오른 모든 이들이 전부 흑인 여성이다. 다소 날씬한 체형의 여성도 눈에 띄지만, 어쨌든 거의 다 흑인 여성이다. 게다가 제일 놀라운 건 뚱뚱한 흑인 여성 발레리나다. 다큐멘터리에서 이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조금 나오는데, 리조는 일부러 ‘뚱뚱한’ ‘흑인’ ‘여성’ 발레리나를 골라서 데려오자고 했고, 안무가는 애초에 그런 세 가지 조건을 가진 발레리나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발레는 어떤 특정한 몸매, 어떤 특정한 피부 색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지니까. 춤 같은 예술은 차별으로부터 자유롭고 누구나 하고 또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세상에 발레처럼 더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이 또 있을까 싶다. 당연히 피부는 희어야 하고 몸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야 하며 또 집도 좀 잘 살아야 한다. 전문가들의 경우 매일 새것으로 갈아신어야 하는 토슈즈 비용을 대려면 그것도 부담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차별을 딛고서 발레를 하더라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데, 리조가 그런 사람들을 끌어내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 준 것이다. 진짜 내가 이 흑인 발레리나들 중 한 명이었으면 너무너무 고마워서 절하고 싶었을 것 같다.
리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의외로 ‘노블레스 오블레주’ 또는 어떤 분야 내지는 삶의 ‘선배’로서 가져야 하는 태도 또는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내 분야에서 성공해서 나에게 영향력이 생긴다면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관대한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아시아계 여성들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도와줄 수 있을까? ‘자기 편 만들기’라고 사람들이 비난할 텐데 나는 그 비난에 무너지지 않고 세상에 있어야 마땅한 평등과 정의를 위해 ‘내 편’들을 위해 내 자원을 쓸 수 있을까? 진짜 그러고 싶다. 어차피 어느 업계, 어느 분야를 가든 남자들은 자기들만의 ‘보이즈 클럽’(또는 내가 자주 표현하듯 ‘알탕’)을 만들어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고 자기네들끼리 편을 들어주는데, 내가 또 못할 건 뭔가. 어떤 분야든 여자들의 절대적 수가 많아야 남자들이 적어도 ‘눈치’라고 보지 않겠느냐 이거다. 말하고 나니까 얼마 전에 읽은 위근우 기자의 <뾰족한 마음>의 한 문단이 떠올랐다.
- 소셜 네트워크 연구자인 데이먼 센톨라의 책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선 다수가 믿거나 지키는 기존 통념을 변화시킬 수 있는 헌신적 소수의 숫자가 어느 정도일 때 변화가 일어나는지 실험과 실제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그가 주장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티핑 포인트는 전체의 25퍼센트로, 새로운 생각을 지닌 이들이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늘어나는 것으로는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20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늘어날 땐 드라마틱한 변화가 벌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티핑 포인트로 강한 고정관념과 규범이 바뀐 실례로 덴마크 의회를 제시한다. “수세대에 걸친 정치 분야의 젠더 편견”은 너무 확고해 “정채 분야에서 여성이 맞닥뜨리는 난관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입법부에서 여성의 수가 티핑 포인트인 25퍼센트를 넘어서며 ‘상징적 소수’에서 벗어나자 기존의 젠더 편견이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수가 많아지자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적용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맞다, 절대적인 머릿수가 중요하다. 나도 영향력이 따라오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뭐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하다못해 직장에서 내 밑에 직원 하나라도 더 둘 수 있다면) 그때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내 영향력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리조 언니처럼 존나 짱 센 언니가 되어서 동생들을 이끌어 줘야지!!!
아, 그리고 이건 리조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뚱뚱한 여성을 위한 옷도 충분히 예쁘고 섹시하고 부티나게 만들 수 있구나’ 싶다. 근데 패션 업계는 오직 마른 몸매만 인정하고 그걸 미의 기준으로 내세우니 뚱뚱한 여성들을 위한 옷은 취급도 안 하는 곳이 많다. 예쁜 빅 사이즈 옷을 만들 기술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만들 의지가 없는 거라는 사실을 리조를 보고 알았다. 여성에게 오직 마른 몸매만 강요하는 브랜드들 너무 괘씸하다. 다 망했으면 😡
다큐에서 알게 된 트리비아 세 가지를 아래에 나누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 리조는 TED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트월킹’의 기원이 흑인 문화에 있다는 사실과 그 트월킹을 통해 자신의 몸(특히 마음에 들지 않던 엉덩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 리조의 본명은 ‘멜리사(Melissa)’인데 거기에서 ‘리소(Lisso)’라는 애칭이 나왔고, 또 그걸 조금 변형해서 지금의 예명 ‘리조’가 되었다.
➕ 리조는 2022년에 자신처럼 뚱뚱한 여성을 위한 셰이프웨어 브랜드 ‘이티(Yitty)’를 차렸다. 웹사이트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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