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Dog(도그)>(2022)
⚠️ 아래 영화 후기는 <Dog(도그)>(202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레이드 캐롤린, 채닝 테이텀
미군 육군 유격수(US Army Rangers) 출신 잭슨 브릭스(채닝 테이텀 분)는 과거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당시 입은 뇌 부상과 PTSD를 앓고 있다. 다음 번 파키스탄에 파병 나가는 데 지원을 하려 해도 이 부상 때문에 퇴짜 맞기 일쑤다. 혹시나 상관이 이 파병을 허락해 줄까 싶어서 전화도 해 봤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울리길래 기대하며 받았더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온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같은 부대에 있었던 동기이자 친구인 라일리 로드리게즈(에릭 우르비츠톤도 분)가 전날 밤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가다가 나무를 들이박아 사망했다는 소식. 다음 날, 그 동네 펍에서 열린 로드리게즈의 추도식에 참여한 브릭스는 자신이 있던 부대의 중대장이었던 존스 대위에게 제안을 하나 받는다. 라일리의 파트너였던 군견(軍犬) 룰루를 애리조나 주에서 치러질 로드리게즈의 장례식에 참여시킨 후 안락사를 받을 수 있도록 화이트 샌즈 미사일 레인지(미군의 미사일 테스트 기지)까지 인도해 주면, 브릭스가 그렇게 원하던 파병을 갈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추천해 주겠다는 것이다. 룰루는 파트너를 잃은 데다가 군견으로 생활하며 얻은 PTSD 때문에 현재 아주 공격적이 된 상태다. 브릭스는 정신 건강을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위험하디 위험한 파병의 길을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한 남자와 그의 개는 로드리게즈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길에 오른다.
액션 영화에 여자 주인공이 존재하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액션 영화의 남주 정도 됐으면 과묵하고, 거칠고, ‘남자다움’의 거의 정점에 존재하는 그런 남자일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 자기 과거는 어땠고, 지금 기분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여자 주인공이 필요한 것이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과거에 대해 질문하거나 남자 주인공이 무심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빵야빵야 쏘아 죽이거나 무술로 그들의 육신을 너덜너덜한 걸레짝으로 만들 때 여자 주인공이 이에 경악하고 오들오들 떠는 역할을 해 줘야 관객들이 남자 주인공이 정말 ‘남자다운 남자’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렴, 남자가 죽을 수도 있는 임무를 하러 가는데 자기 입으로 너무 두렵다는 말을 하면 폼이 안 살지. ‘당신은 거기서 죽을 수도 있어요, 제발 가지 마요’ 같은 말을 여자 주인공이 펑펑 울면서 해 줘야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액션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이란 남성 관객을 위한 눈요깃감이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남자 주인공이 가지거나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아웃소싱 받은 하청 업체 같은 존재다.
이 영화에서 룰루라는 군견은 액션 영화의 여자 주인공 같은 역할을 맡았다. ‘유독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군에서 구르고 구른 브릭스에게 감정이란 생소한 것이다. 그는 여자들과 원나잇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여성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불쌍한 남성인 척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군에서 겪은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할 능력은 없다. 브릭스가 룰루를 맡았을 때 존스 대위에게 받은 “I Love Me”라는 책에는 룰루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을 때의 사진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룰루를 데리고 다녔던) 로드리게즈가 룰루에게 쓴 ‘네가 나를 치유했어, 고마워’ 하는 내용의 글 등이 잔뜩 담겨 있는데, 브릭스는 이게 그냥 정신과 치료에서 쓰게 만드는 감상적인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런 정신과 치료가 꼭 필요한 상태다. “I Love Me” 책에 담긴, 룰루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했을 적 바디 캠 영상을 모아 구운 CD에 ‘Greatest Hits(이해가 되시려나? 군인들이 총을 쏘니까 그야말로 ‘명중’이라는 뜻으로 쓰인 거다)’라는 제목을 붙인 게 그는 아니겠지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처럼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정신 건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준다. 잔인한 것을 잔인하다고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 뇌가 절여져 둔감해진 상태이니 말이다.
다행히, 여러분들도 예상할 수 있듯이, 브릭스는 룰루와 애리조나 주까지 여행하며 정이 들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연다. 그리고 룰루는 인간을 신뢰하는 충직한 동물들 특유의 선한 에너지로 브릭스를 조금씩 치유한다. 애리조나로 가는 길에 만난 부드러운 심성의 여인 타마라(제인 애덤스 분) 덕분에 다정한 말로 개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브릭스와같은 유군 유격수 출신이지만 현재는 은퇴해 룰루와 같은 배에서 난 형제 누크를 입양한 노아(에단 서플리 분)를 통해 인간과 개가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본 것도 이에 도움이 된다. 로드 트립의 과정을 모두 스포일러할 수는 없지만 그 와중에 어떤 동지애와 우정이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브릭스가 후반부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룰루를 안락사시키는 대신 입양하는 것은 너무나 이해할 만하며 솔직히 예상 가능한 처사다. 다만 이 영화에 조금 불만이 있다면, 로드 트립을 길게 보여 준 데 비해 브릭스가 룰루를 입양한 이후 같이 살면서 치유받는 과정을 너무나 짧게 보여 준다는 것이다. 치유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고 또 좋다가도 다시 안 좋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도 흔한데, 그 너저분할 수 있는 치유의 여정을 그냥 예쁘게만 포장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우려됐다. 사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애리조나로 가는 길에 브릭스가 자신의 아내인 니키(코리안카 킬처 분)에게 둘 사이에서 낳은 딸 샘(프랜신/재클린 시맨 분)에 관해 이야기하려다가 한 번 대차게 까였는데, 영화 후반에 ‘치유 과정’에서는 무슨 기적이 일어났는지 둘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브릭스와 샘이 만나는 것도 니키가 허락한 듯하다. 아니, 갑자기 어떻게 니키의 신뢰를 얻은 거지? ‘그냥’ 브릭스가 변했나요? 그리고 그걸 니키가 믿어 줬다고요?
영화 후반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묘사되는 ‘치유 과정’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감동적이고 재미있다. 긴 군생활로 인해 PTSD를 얻은 군인이라는, 자칫하면 음울할 수 있는 소재에 개와 약간의 유머가 얹어져서 너무 무겁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도 감동을 주는 영화라 하겠다.
+ 여담이지만 채닝 테이텀은 이렇게 운동선수라든지 군인처럼 금욕적이고 한 길만 깊게, 오래 파야 하는 직업 역할과 참 어울린다. 채닝 테이텀과 스티브 카렐,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주연한 <폭스캐처(Foxcatcher)>(2014)도 기가 막히게 좋은 영화였는데, 그때의 채닝 테이텀 모습과 겹쳐 보였다. 혹시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면 이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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