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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by Jaime Chung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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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알코올 중독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한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에세이로 아마 가장 유명한 캐럴라인 냅. 한국에 잠시 여행 갔을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명랑한 은둔자>의 종이책을 발견해서 사 왔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고서야 이 책을 끝냈다. 캐럴라인 냅의 섬세하고 솔직한 글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이 책은 짧은 에세이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보니 긴 호흡으로 쭉 이어지는 글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초반에 있는 글들 중 하나인 <수줍음의 옹호>는 너무너무 내 마음에 쏙 들었고, 공감이 됐다.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하기도 했다. 일단 저자가 자신의 수줍음을 묘사한 부분을 보시라.

나는 평생 내 머리카락을 당연시하고 산 것과 비슷하게 거의 평생 수줍음과 함께 살아왔다. 내 머리카락은 예나 지금이나 곧고 가늘다. 내가 설령 굵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갖기를 바라더라도, 머리카락의 신들은 내게 그 대신 지금의 이 머리카락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설령 자신감 있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성격의 신들은(유전학자, 뇌 화학자, 환경론자로 구성된 팀인 듯하다) 나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끝난 이야기다. 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이라곤 할 수 없지만, 나는 늘 남들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서 내 수줍음을 나라는 사람의 핵심적이고 변치 않는 속성으로 이해해주기를 기대했다. 쟬 다그치지 마,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 하고. 내가 새로 사귄 친구나 애인에게 엄청 적극적으로 굴거나 감정을 한껏 드러내지 않더라도, 상대가 그 사실을 언짢게 여기진 않기를 기대한다. 쟤한테 시간을 줘, 그러면 쟤도 차차 풀어질 거야, 하고. 내가 옆집 여자와의 대화를 자꾸만 곱씹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내 수줍음이 내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며 40년 가까이 살아왔다. 이 문제로 불편한 사람은 나야, 자의식과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나야, 나보다 덜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편안하니까 그들이 나를 봐줘야 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은 좀 헷갈린다는 이웃의 말을 듣고 보니 좀 까다로운 의문들이 떠올랐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비록 부지불식간이기는 해도 특수한 형태의 힘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어떤 사람의 수줍음을 본인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수줍음을 타든 안 타든) 경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그러던 어느 날, 저자가 어느 모임에서 자신보다 숫기가 더 없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했는데, “그 젊은 여성은 사교의 자리가 불편해서 몸을 꼬고 있었다.” 저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 “그는 한참 대답할 말을 찾다가 최대한 짧게 대답하고는(음…… 아직 학생이에요”)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면서 내 반응을 기다렸다.” 당연히 저자는 그 젊은 여성과의 대화를 불편해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가 괴로웠다. 그가 받는 스트레스가 내게도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좀 더 복잡한 감정, 짜증이랄까 심지어 분개심이라고도 할 만한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어색한 침묵이라면 나도 익히 알지만 — 그게 뭔지 알고, 그걸 두려워하고, 그걸 미워한다 — 내가 그 침묵을 메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침묵을 메우는 데는 — 한가한 잡담을 나누든 진심으로 관계를 맺는 대화를 나누든 — 노력이 든다. 나는 그 젊은 여성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이봐요, 이런 상황이 힘들다는 건 알아요. 나도 수줍음이 많으니까, 하지만 당신도 내가 이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줘야 해요. 냉혹한 진실인 바, 수줍음을 타는 사람들은 함께 있기가 힘들 수 있다.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도맡게끔, 관계 맺기에 선행하는 지루한 일을 도맡게끔 만든다. 이 젊은 여성이 아직 몰랐던 사실은 — 나도 이제야 조금 알게 된 사실인데 — 그가 수줍음 탓에 스스로는 남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느낄 테지만 실제로는 적잖은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남들과 한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 능력이 있다. 스스로는 남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끼거나 남들을 두려워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에게는 또한 선택지가 있다. 입을 열 수도 있고, 아니면 침묵을 지킬 수도 있다. 남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도 있고, 아니면 닫힌 채로 있을 수도 있다. 관계 맺기에 필요한 일을 얼마간 맡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일을 타인의 손에 완전히 맡길 수도 있다.

와, 이렇게는 생각 못 해 봤는데! 순전히 이 에세이 덕분에 다른 사람, 특히 낯선 사람들과 대화해야 할 때가 있을 때 나는 정말 상대가 너무 싫어 죽겠다 하는 게 아니면 내가 먼저 말 한마디라도 먼저 나서서 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나는 여전히 내향적이고 동시에 내성적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해요’라는 태도로 가만히 입을 꾹 닫고 있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나의 가능성과 능력을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된 덕분이다.

 

또 내가 무척 공감했던 건, 저자는 거식증(전문 용어는 신경성 식욕부진)을 심하게 겪었던 시기를 회상하는 글이었다. 내가 거식증이었던 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식욕이나 먹는 걸 절제하는 걸로 자신에게 압박을 주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 나도 그런 적이 있었고 또 여전히 때때로 그러기 때문에 이 부분이 무척 공감됐다.

어느 중독처럼 굶기도 일종의 대처 기제다. 자기 보호 행동이다. 처음 굶기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음식 생각뿐이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먹을지, 언제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 그게 너무 많거나 부족하진 않을지. 그리고 머릿속에 음식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남자나 친구나 세상의 사건들도, 내가 젊고, 숫기 없고, 겁먹고, 외롭고, 화나 있다는 사실 같은 것도 물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굶으면 또 내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은 날에는 — 내 식단을 고수하는 날에는 — 퇴근할 때 식료품 가게와 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오면서 내 의지를 시험했다. 고급 식료품 가게, 던킨 도너츠, 과자 가게, 노천카페, 빵집을 지나쳤다. 도넛에 발린 달콤한 시럽 냄새를 맡았다. 프렌치프라이, 데리야키 치킨윙, 홈메이드 귀리빵 냄새를 맡았다. 그러면 내가 대단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저 많은 음식들 속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강렬한 식욕을 참을 수 있다니. 나는 강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좋은 날에는 또 내가 우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길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 식료품 봉지를 든 사람들, 카페에서 먹고 있는 연인들 — 내가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그들은 식욕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초월했고, 그들은 충동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정복했다. 나 자신이 사실상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느끼던 시기에, 굶기는 내가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음식을 조절하는 게, 인간관계나 삶의 다른 문제들을 조절하는 것보다는 쉽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 거기에 집착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나는 특히 퇴직을 한 후에 그렇게 방을 치웠고, 방을 치우는 게 내 삶에서 내가 가진 통제력, 어떤 대상을 내 힘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방법이었다. 식욕을 통제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외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슬픔을 받아들인 경험이라든지, 불공평한 상사의 압력 또는 제안에 당당히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던 자신에 분노한 경험 등, 공감도 되면서 통찰도 지닌 깊이 있는 글이 많다. 각 글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한 권에 더 많은 글을 실을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저자의 다양한 소재에 대한 글을 읽어 볼 수 있었던 것이 참 만족스럽다. 물론 긴 호흡의 글도 읽어 보고 싶지만. 저자 소개처럼, ‘지적이고 유려한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를 읽고 싶다면 캐럴라인 냅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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