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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사구,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

by Jaime Chung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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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사구,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

 

 

어느 날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이 책 웃기겠다며 링크를 보내 줬는데 흥미로워 보여서 단번에 주문했다. 이 책은 출간도 되기 전에 벌써 드라마화가 확정됐다고 한다. 책 소개말을 빌리자면 ‘소심하고 평범한 디자이너와 신세대 무속인’의 조합이 말만 들어도 흥미로운데, 읽어 보면 영상화하기에도 적당한 에피소드가 많아서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밤에 옆집 커플이 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가 극에 달한 주인공 김하용은 ‘무당언니’의 유튜브를 보고 부적을 직접 만들어 옆집에 붙인다. 그때부터 그는 ‘악귀’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데…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이 소설의 매력을 소개해 보자면, 저자의 상상력이라 하겠다. 다들 알겠지만 무당이 퇴마를 할 때는 귀신을 쫓는다는 팥과 복숭아나무 가지를 쓰는데, ‘무당언니’는 직장 상사에게 씌인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하용에게 이 두 가지를 사용하라고 귀띔해 준다. 그래서 하용은 직장 상사에게 팥을 먹이고 복숭아나무 가지로 때릴 방법을 고민한다. 결국 하용이 떠올린 방법이 너무 웃긴데 이것까지는 밝히지 않겠다.

 

책 소개도 할겸 내가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을 몇 부분 꼽아봤다. 아래는 맛보기라고 생각해 주시길.

“아하, 그럼 비용은…….” 무당언니는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백만? 숫자를 읽다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니, 한 팀장 따위를 위해 이런 돈을 내라고? 그냥 악귀랑 계속 회사를 다니고 말지. 악귀와의 공존을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무당언니가 다시 말을 꺼냈다. ”가격이 너무 세다면, 좀 싸게 해 줄 수 있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뭐죠?” ”네가 퇴마를 도와주면 돼. 그럼 할인이 들어가서.” 무당언니는 다시 종이에 새로운 금액을 썼다. 이십팔만 구천원. 무려 칠십 퍼센트의 할인율이었다. 이거 완전 거저잖아? ”할게요, 퇴마.” 그렇게 난 계약서를 작성하고(이제 생각해 보니 퇴마 실패 시 금액은 반환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시불로 카드결제를 한 뒤 돌아왔다. 그날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곧 퇴마가 시작될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이것은 모르리라 확신하다. 그 부적은, 내가 쓴다. 신기(神氣)라고는 내일 먹을 점심조차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없으며, 신을 모신 적이라고는 어린 시절 떡볶이를 사 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교회에 따라 갔던 몇 번뿐인데. 이런 내가 출근 첫날부터 부적 쓰기 연습을 해서 지금은 판매용까지 제작한다. 겨우 나 따위가 만든 부적을 사람들에게 팔아도 되는지 믿을 수 없어 무당언니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느냐고. 그러자 무당언니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담아 작성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나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떠나질 않자 ‘이건 일종의 테라피다’, ‘사람들은 효과를 바라고 사는 게 아니다’라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는 갑자기 ‘네가 디자이너니까 부적을 디자인한다고 생각해라’라고 덧붙이더니, ‘역시 디자이너라 부적도 예쁘게 잘 뽑지 않느냐’라며 칭찬을 섞어서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하필 대학생 때 주민센터 문화회관에서 캘리그라피를 배운 적이 있다 보니 내 부적은 누가 봐도 그럴싸했다. 그래서 무당언니의 말이 얼핏 납득되려 했다. 하지만 ‘부적 디자인’이라니. 미술학원에서 입시 준비를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대학교 때도, 현업 UX/UI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분야의 디자인이다. 부적 디자인 같은 것을 하다 보면 앞으로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토속신앙 및 종교계 디자인이라는 틈새시장으로 진출하게 되는 걸까? 너무 조그마한 틈새에 끼여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인기 있다는 애정 부적과 재산 부적을 끊임없이 찍어 내고 있다. 무당언니가 아무리 장사꾼이라 하더라도 정작 나는 그 장사꾼의 일개 직원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드라마로 치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단편 소설들이 이어지는 구조라, 이 사건이 이렇게 해결되고 또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고 보는 재미가 있다. 336쪽으로 심하게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길이라 캐릭터들의 매력과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서 한동안 즐기기에 충분하다. 악귀 얘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무섭거나 징그러운 것도 아니니 나 같은 쫄보도 능히 읽을 수 있다. 오컬트를 소재로 한 독특한 코미디 소설을 보고 싶다면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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