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마르타의 일>
박서련 작가님은 정말 소처럼 열심히 일하신다. 내가 알라딘에 박서련 작가님의 신작 알림을 신청해 놨더니 정말 자주 알림 메일이 왔다. 온전히 자신만의 글로 채운 소설도 있고, 다른 작가들과의 앤솔러지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책을 자주 내시지. 그러다가 발견한 게 이 책이었는데, 하필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한이 열흘 정도 남았다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의외로 스릴러에 가깝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SNS상에서 ‘봉사녀’라고 불리는, 봉사 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진 SNS 셀럽 임리아가 사망한다. 임리아의 본명은 임경아. 소설은 경아의 언니인 수아가 자신의 동생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범인을 추적해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경아 생전에 경아에게 ‘디지털 장례식’을 치러 줄 것을 부탁받았다는 친한 지인 ‘익명’의 도움을 받고 또한 그와 협조하면서.
책의 거의 시작부터 상황이 제시되고 사건이 빠르게 진행된다. 아니 이렇게 심장이 쫄깃해지는 진행이라니! 이렇게 흥미진진한 책을 읽는데 잠이며 먹고사는 일(말 그대로 먹는 일과 살기 위해 하는 일…) 때문에 책을 내려놔야 했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아니 진짜 내가 하루에 8시간 일할 필요만 없었으면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을 텐데…
조금 강한 어조로 답장을 보내보기로 했다.
자살이 아닌 건 어떻게 아시죠 옆에서 보셨어요?
경아가 자살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것과 그렇다고 확신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경아가 자살한 게 아니라고 확언할 만한 요소는, 지금으로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익명 프로필 사진 옆으로 말줄임표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애니메이션이 말풍선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봤습니다
가슴이 뛰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아까 경찰이라고
경아 핸드폰 맡으라고 한 사람
접니다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급실에서 경찰이라는 사람을 봤을 때…… 정황이 어땠지? 그 사람 어떻게 생겼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인상은 어땠는지, 목소리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생각나는 게 전혀 없었다. 남자였던 것만 생각나고, 경찰이라는 말만 들었지 신분 확인도 하지 않았다. 경황없던 참이어서 의심이고 뭐고 할 여유가 없었다. 경찰복을 입고 있지 않았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조금 위화감이 들었던 것도 같지만, 일이 벌어지고 한참 지난 뒤에야 어쩐지 조금 이상하더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일단 진짜 경찰이라면 증거물에 제3자의 지문이 묻게 놔둘 리가 없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자 팔다리가 떨렸다.
제목으로 쓰인 <마르타의 일>은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 어차피 극 중에서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거의 독자들에게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기 때문에 나는 간단히만 설명해도 될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일화에 따르면,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를 방문하셨을 때 언니인 마르타는 손님을 접대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딱 붙어서 예수님 말씀 듣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자기를 돕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마르타가 수아, 마리아가 경아라고 보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한 일도 물론 중요하고, 예수님은 여자인 마리아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를 수 있다는 걸, 이 일을 통해 다른 남자들(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실려 있다. 누가복음은 제목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누가가 쓴 복음이다. 누가는, 당연히, 남자였다)에게 말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그 동행들을 모시는 일을 하는 누군가도 있어야 한다. 그 일을 마르타가 맡았을 뿐이다. 마리아의 일도 중요하지만, 마르타의 일도 중요하다. 마리아, 즉 경아가 한, 진심에서 우러난 봉사 활동도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런 마리아가 살해당했을 때 그녀를 대신해 복수하는 마르타, 즉 수아가 하는 일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사회에서 범죄자를 몰아내고, 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일이니까. 그런 과정에서 마르타의 손에 피가 묻고 또 그 일의 결과로 죄책감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할지라도.
이 소설은 확실히 여자라서 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자매간의 이런 끈끈한 사랑을 모를 것이고, 아마 상상조차 못하겠지.
어떻게 해줄까?
영정을 향해 물었다. 영정 속의 경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모나리자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세상에서 가장 임경아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당연히 임경아 본인이다. 설령 임경아가 세계 최고로 임경아답지 않은 짓을 벌인다 해도 임경아의 일인 이상 그건 임경아다운 일이 된다. 이제 세상에 임경아가 없다고 할 때, 그나마 가장 임경아에 가깝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나는 재고의 여지 없이 그게 나라고 믿었다.
내가 바로 경아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아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과 열등감과 우월감과 애정과 경멸, 그 밖의 여러 감정으로 얼룩져 있다. 그 마음의 역사는 경아의 생애와 똑같이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년생 중 언니로서, 기억도 안 나는 젖먹이 시절부터 나는 경아와 경쟁하고 경아에게 사랑받고 경아를 지켜왔다.
그럼에도 경아가 내게 무엇을 바랄지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착한 그 애가 영정 사진 그대로의 표정을 하고 언니 제발 나 때문에 위험한 짓 하지 마, 라고 하는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이 나를 속이는 것인지, 정말 경아가 그걸 원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헷갈렸다.
나, 그냥 내 마음대로 한다.
아, 그리고 이제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레즈비언 커플까지. 누구랑 누구라고 스포일러는 안 하겠지만 여튼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또 나와서 그저 반갑다. 내가 이전에 리뷰를 썼던 박서련 작가의 <마법소녀 복직합니다>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제는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마르타의 일>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릴 넘치는 소설이라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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