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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해인,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

by Jaime Chung 2024.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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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해인,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

 

저자 김해인은 와야마 야마의 만화 <여학교의 별>을 국내에 정식으로 출간해 이 만화가를 국내에 알린 만화 편집자이다. 내가 리뷰를 간단히 쓴 적 있는, 박서련 소설가와 정영롱 만화가의 협업작 <제사를 부탁해>를 기획하기도 했다. 만화 편집자라는 직업이 웹툰 PD와 만화를 만드는 데 참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하지만 살짝 결이 다른지라 그 점도 흥미롭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자면, 웹툰 PD는 만화/웹툰 제작에 기획이라든지 이런저런 조언 등을 통해 다소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만, 만화(책) 편집자는 이미 그렇게 제작된 만화를 국내에 들여와, 단행본을 제작하는 데에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단행본의 겉표지라든지 속지 등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출간 기념 굿즈를 만든다면 어떤 것을 만들 것인지, 몇 부나 찍을 것인지 같은 것은 전적으로 이 만화 편집자의 손에 달려 있다.

책 첫머리에 만화가 난다는 이 책을 위한 ‘추천의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뭔가를 너무 좋아해서 조금은 이상해져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 이 말보다 저자를 더 잘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 듯하다. 이어서 난다는 이렇게 썼다.

‘만화 편집자’.

나는 그들이 무섭다. 나야 내가 좋아해서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건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그린 것도 아닌데 자기 손모가지를 —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손목 터널을 — 걸고 말풍선 수백 개를 옮겨가며 마우스를 천만 번 두드리며 만화책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도 별로라고 자학하는 만화를 ‘세계 최고’라고 확신에 차서 말해준다. 진짜 되게 이상하다 이 사람들……

그중에서도 최근 몇 년간 꽤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 와 이 만화 뭐지 싶으면 발행 정보 페이지에 언제나 등장하는 그 이름, 한 번도 같이 일한 적 없는데 스윽 다가와서 고급 사탕 주고 간 그 사람, 이상할 정도로 SNS에서 맨날 맨날 만화 얘기만 하는, 짐짓 모른 척 지켜봐온 ‘그 만화 편집자’ 김해인씨. (네. 편집자가 만화가를 들여다보면 저희 만화가들도 편집자를 들여다봅니다.)

만화를 얼마나 사랑하면 만화 편집자라는 일을 할까? 나는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그냥 일반 문학이라든지 에세이라든지 하는 책의 편집자는 당연히 알았지만, 만화만 전문으로 하는 편집자? 어째서인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만화 전문 출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저자는 만화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다. 저자가 “그냥 재밌어서, 좋아해서 본” <효정의 발화점>라는 웹툰과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감동적이다. 그는 이 웹툰을 읽고 반해 박선우 작가에게 바로 단행본 출간을 제의하는 메일을 보냈으나, ‘데이터가 출판에 적합하지 않아 어려울 것 같다’라는 답변을 듣고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피키캐스트(<효정의 발화점>이 제일 먼저 연재된 플랫폼)를 “수도 없이 들락거리며” <효정의 발화점>을 읽었고, 피키캐스트가 사라지자 <효정의 발화점>도 더 읽을 수 없어 아쉬워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박선우 작가의 트위터에 <효정의 발화점>이 카카오웹툰에서 서비스된다는 소식이 올라왔고, 다시 한 번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원고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출판에 가능한 해상도와 사이즈를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라는 회신을 받았고, 이윽고 2023년 4월 <효정의 발화점>의 단행본이 출간됐다! 말인즉슨, 저자가 “순전히 내가 책으로 갖고 싶단 마음 하나로” 시작해 작업해 출간했다는 뜻이다. “삼 년 동안 잊지 못하고 죽지도 않고 또 와서 기어코 이 책을 책장에 꽂았다.” 이런 집착은 좋은 집착 아닙니까!

 

이렇게 저자는 감명받은 만화를 책으로 가지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화를 편집해 출판하기도 하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잘된 작품에는 솔직하게 감탄하기도 한다. 만화가 오카자키 교코의 <리버스 에지>는 자신이 무척 작업하고 싶었던 작품이지만, 다른 편집자의 손을 통해 국내에 출간됐다. 저자는 눈물을 흘리며 <리버스 에지>를 세 권 샀는데, “그런 아쉬움과 미련이 무색하게 감탄이 나온다”라고 극찬했다.

내가 만화 편집자가 된 것이 2018년 6월이고, 『리버스 에지』가 출간된 것은 2018년 10월이다. 드디어 만화 편집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간발의 차였지만 판권이 만화 편집자가 될 나를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며 『리버스 에지』를 세 권 샀다. 하지만 고트(goat, 쪽프레스의 레이블)의 편집을 거쳐 출간된 『리버스 에지』를 보면 그런 아쉬움과 미련이 무색하게 감탄이 나온다. 여러 나라에서 출간된 『리버스 에지』 표지 중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지. 앞표지에서 뒤표지까지 대지 전체에 깔린 하늘색과 핑크색 그러데이션은 늘 몸에 멍을 달고 사는 야마다의 피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묘하고 독특한 본문 서체. 교코 작가의 거칠고 성근 그림체와 묘하게 붙는 것이(뚜렷한 기준은 없지만, 느낌상 명조와 붙는 그림체가 있고 고딕과 붙는 그림체가 있다) 가독성을 대신하는 또다른 매력을 자아낸다.

내가 『리버스 에지』를 편집해서 냈다면 이런 표지를 입히지도, 이런 서체로 편집하지도 못했을 거다. 그저 원서의 표지와 똑같았을 것이고, 본문은 별 고민 없이 나눔고딕 아니면 산돌명조neo를 썼을 것이다(나눔고딕과 산돌명조가 별로라는 게 아니라 늘 하던 대로 가독성을 최우선해 편집했을 것이란 뜻이다). 아니 그냥 이제 막 편집자가 된 내가 『리버스 에지』를 편집해봤자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틀림없이.

책도 편집자와 출판사를 탄다. A 출판사에서 나왔을 때는 잘 안 됐는데 같은 타이틀을 B 출판사에서 내니 잘됐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다. 『리버스 에지』를 포함해 교코 작가의 책들은 실험적이고 아름다운 책을 내기로 유명한 쪽프레스에서 나와서 독특한 아이코닉함을 얻고 만화 독자를 넘어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리버스 에지』를 볼 수 있다니, 내가 편집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라고 쓰면서도 역시 내가 편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고 말하지만 이젠 더 말을 보태고 싶지 않을 만큼 쪽프레스의 손을 거쳐 출간된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들을 사랑한다. (진짜 끝.)

아주 조금 변명을 하자면 일본 만화는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워낙에 내로라하는 만화 전문 출판사들이 있고 그들이 만화에 집중하는 만큼 속도며 권수며 똑같이 따라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해도 ‘반년 전 행방불명되었다가 돌아온 친구 히카루에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요시키. 내 친구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너라도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이라는 줄거리의 호러 소프트BL 힙스터 만화 『히카루가 죽은 여름』의 표지 하단에 ‘문학동네’라고 적혀 있다면 요시키와 마찬가지로 조금 위화감이 들 것 같다. 너 문학동네 아니지……? (“너 히카루 아니지……?”)

 

책은 만화 얘기가 당연히 주(主)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얘기도 재미있다. 예컨대, ‘김해인 양은 친구가 없다’라는 꼭지는(이 제목은 꼭지 내에서 언급되는 사쿠라 준의 만화 <유가미군은 친구가 없다>의 패러디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주말이 끝날 때쯤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타인의 스토리를 훑어보면서 놀고들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진짜로 다들 놀고 있기 때문이다(비꼬고 싶었다면 작정하고 ‘놀고들 자빠졌네’라고 말했을 거다). 참으로 신기하도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친구가 많은 걸까. 나는 한창 사회적 거리 두기를 엄격히 시행할 때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말을 듣고 의아했다. 다들 다섯 명이나 만날 친구가 있어? 거짓말…… 그런데 모두가 여럿이서 함께 여행을 가고, 파티를 하고, 전시를 보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인생네컷을 찍고, 이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겨 SNS에 게시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 밥 먹고 만화 보다가 낮잠 자고 일어나 다시 저녁을 먹고 만화를 읽다가 잘 준비를 하는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 다들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 친구를 사귀어서 놀고들 자빠진 걸까.

 

저자가 처음으로 친구에게 ‘간택’을 당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그 친구는 팬시한 그림체가 돋보이는 <슈퍼갤즈>에 나올 것같이 엄청나게 예쁘고 옷을 잘 입는 친구였는데 그런 애가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 아직까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 이후로는 어떤 사람을 친구로 부르는지 고찰해 보는데, 이를 테면 함께한 시간이 적어도 일 년, 이 년은 되어야 하고, 사적인 연락과 만남을 가져야 한다. 서로 욕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마지막으로 이건 나의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내 친구에게 친구가 너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야 나도 친구가 많이 없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친하게 여겨주는 이들은 하나같이 많은 친구를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차후 정계 진출을 해도 손색없을 만큼 두터운 인망을 갖춘 훌륭한 사람만이 나 같은 녀석도 친구로 거둬주기 때문이다.

“차후 정계 진출을 해도 손색없을 만큼 두터운 인망을 갖춘 훌륭한 사람만이 나 같은 녀석도 친구로 거둬주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 이런 표현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내시는 거예요!

 

나는 만화를 잘 안 봐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은 부분도 있지만(위에 언급된 <효정의 발화점>이나 <리버스 에지> 등의 만화를 안 봤기에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다), 만화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더 재미있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듯. 워낙에 언급되는 만화들이 많은지라, 읽을 만한 만화를 찾고 있으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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