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바버라 애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긍정의 배신>으로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 바버라 애런라이크가 실제로 '워킹 푸어'들의 세계에 잠입해 그들처럼 일하며 겪은 경험을 쓴 책이다.
그녀는, 책 뒷표지에 쓰인 문구대로, "죽어라 일하고 무시당하고 어리둥절해하다 마침내 분노"한다.
그녀는 세 곳(플로리다 주, 메인 주, 미네소타 주)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무르며 정말 미숙련 노동자처럼 일한다.
처음은 웨이트리스, 그다음은 청소부, 마지막은 판매원이었는데, 그녀가 이 '잡입' 르포르타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준비를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비상금을 마련하고 일을 나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등) 그 어느 것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적절한 숙소를 잡기가 세 주 그 어느 곳에서도 쉽지 않았다. 버는 돈의 최소 40%는 집세로 내야 했으며, 그렇게 사는 곳이 호텔급으로 깨끗하거나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1990년대 말에 시간당 7달러 정도를 받는 일들을 했는데, 버는 돈을 집세와 식비, 정말 꼭 필요한 물건 구입비(약이나 매장에서 근무하기 위해 규정에 맞는 옷을 구입해야 했다)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워킹 푸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보다 약 20달러나 손해를 봤다.
그나마 그것은 그녀가 이미 저널리스트로서 이전에 벌어 둔 돈이 있어서 정말 긴급하게 약값이 필요했을 때 약을 살 수 있었고 적당한 숙소를 찾지 못했을 때 그 예비금으로 때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녀를 모두 키운 이후였고, 홀로 생활했기에 돈이 가외로 들 일이 없었다.
이전에 에어로빅이나 역기(!) 등으로 체력을 관리해 둔 것도 그녀가 큰 부상 없이 정말 열심하고 근면히, 일을 빼먹지 않고 출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게 의외로 상당히 중요한데, 20대 젊은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정도 체력이 있다는 것은 일단 일하는 데 플러스 요인이 됐다.
그리고 그녀가 짐(gym)을 다니며 체력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르포르타주 프로젝트 이전에 말이다)이었다는 건, 운동이나 노동으로 인해 피로할 때 쉴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적절한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부상이나 질병으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 벌어 줄 수 있을 형편이 된다는 뜻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워킹 푸어들에게 그건 사치다.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떄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아파트를 구할 때 지불해야 하는 한 달치 집세와 한 달 집세에 상응하는 보증금이 없으니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엄청난 방세를 내야 한다. 가전제품이라고는 끽해야 전열기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살아야 한다면 콩 스튜를 잔뜩 끓여 냉동시켜 놓고 일주일 동안 먹는다든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주로 패스트푸드나 핫도그 또는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수프 같은 걸 사 먹게 된다. 의료보험에 들 형편이 안 되니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약도 구할 수 없고, 그러다 결국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녀는 취업을 하기 위해 약물 검사와 질문지("모든 규칙을 언제나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같은 질문이 있고 결과는 컴퓨터로 처리한다) 같은 굴욕적인 과정도 거쳐야 했다.
그렇게 얻은 일자리라고 해 봤자 말 그대로 몸을 혹사하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전에 하던 일과는 너무 달라 힘들었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일에 '숭고한' 이유를 찾아낸다.
즉, 그녀는 웨이트리스 일을 하면서는 손님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모성애적인 정신으로, 가정부 일을 할 때는 동료들이 힘들지 않게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복 매장에서 손님들이 벗어 놓은 옷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일을 할 때는 집에서 남 뒤치다꺼리를 하는 어머니들이 이제는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준다는 정신으로 일을 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돼 있고 앞의 3장은 각각의 지역에서 웨이트리스, 가정부, 그리고 판매원 일을 한 경험을 담고 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한 장에는 이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 이 경험을 돌아보며 깨달은 바를 독자와 나눈다. 그녀가 얻은 교훈은 대략 이러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세상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직업이라도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체험한 여섯 가지 직종은 모두 집중이 필요했고 식당에서 컴퓨터에 주문을 입력하는 것부터 등에 지고 일하는 진공청소기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새로운 기능과 기술을 습득해야 했다. 손쉽게 배울 수 있는 업무는 없었고, 내게 "어머나, 정말 빨리 적응하네요!"라거나 "금방 일을 시작했다고 누가 믿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생 전반에서 성취하 것들과 상관없이 저임금 노동의 세계에서 나는 일하는 법을 새로 배울 줄도 알지만 잘못해서 실수도 저지르는 그저 평균적인 능력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전에 화이트 칼라 노동자였다고 해서 블루 칼라나 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을 쉽게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전에 체력 관리를 잘해 두었다면 물론 '몸 갈아서' 일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보다 처음에는 일을 잘할 수 있겠지만, 그런 노동이 반복되다 보면 정말 건강을 잃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저자는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사는 저임금 노동자들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사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working poor)'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
물론 언젠가는(그게 언제쯤이 될 거라고 예언하지는 않겠다) 그들도 한없이 주기만 하고 그 대가로 그렇게 적은 보상을 받는 것에 지칠 테고,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엄청난 분노와 파업과 혼란이 만연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워킹 푸어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동네 마트에조차 한 번 가 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그리고 아마도 소시오패스거나 사이코패스겠지. 그 일이 힘들지 안 힘들지 꼭 책을 읽어 봐야 아나? 상식적으로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없다는 생각은 못 하나?).
이 세상 어디를 가나 그런 미숙련 저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있을 거고, 그 사람들에게 전부 (직업 교육을 시켜서라든지) 다른 일을 찾아 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일자리는, 우리 자신이 하고 싶지는 않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꼭 필요한 일자리니까.
다만 법적으로는 그들에게 '웬만큼 먹고살 수는 있는' 최저한의 임금을 보장해 주고, 사회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대중적 이해가 널리 퍼지면 좋겠다.
이 책은 2000년쯤 쓰였고 책 뒤에는 첫 출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저자가 이를 되돌아보고 덧붙인 글이 딸려 있다.
거기에서 다시 또 10년쯤 지난 지금 봐도 이 글은 아직도 유효하다. 저자가 워킹 푸어의 삶을 경험한 배경은 20년쯤 전 미국이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될 듯하다(최저 시급이 조금 올랐다고 그렇게 죽을 것처럼 엄살을 떨어 대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용이 더 들고,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거의 전 세계 공통인) 현실을 잘 담아냈다. 비슷한 경험을 다룬 책으로 린다 티라도의 <핸드 투 마우스>가 있는데, 이 저자는 르포르타주를 위해 저임금 노동을 '경험'한 게 아니고 진짜 그냥 평생 그런 일만 해 오며 가난에 허덕이던 진짜 워킹 푸어였다.
<핸드 투 마우스>에서는 기업 측의 중간 관리자들이 저임금 노동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이 책(<노동의 배신>)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되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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