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글 김효은·그림 강인경,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
기자 출신의 저자 김효은이 글을 쓰고 그래픽 디자이너 강인경이 그림을 그린 웹툰 <삼우실>이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원제인 <삼우실>(三憂室)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출근길에는 오늘 할 일이 대해 생각하고
점심시간에는 오늘 뭘 먹을지 고민하고
퇴근 시간에는 지금 퇴근할 시간인지가늠하는 것.
사무실에선 이 세 가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직장 이야기 웹툰인데, 만화 사이사이에 한두 페이지 정도의 (만화 내용과 관련한) 짧은 글이 삽입돼 있다.
주로 작가 김효은이 자신의 기자 시절을 되돌아보며 하는 이야기인데, 그림을 그린 강인경의 이야기가 조금 들어가 있을 때도 있다.
웹툰의 배경은 주식회사 대팔기획이고 주인공 '조용히'는 20대 후반의 중고 신입 사원으로, '꼰대에게 당하면 반드시 갚아주는 성격'이다.
그녀는 김 과장(30대 중반의 일 잘하는 워킹맘)이나 꽃잎 씨(20대 중반.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잡무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 또는 일만 씨(20대 후반 유일한 영상 편집자. 일이 많아서 야근이 잦다) 등과 달리 꼰대에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자기 이름처럼 조용히, 그리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갚아 준다.
예를 들어, 워크숍에 가서 몇 시간이고 술을 마신 후, 상사들은 '우린 먼저 들어가 잘 테니까 젊은 사람들끼리 더 마셔.'라며 자리를 뜬다.
용히는 '저 잠깐 화장실 좀.'이라며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치덕치덕 발라 얼굴에 벌겋게 술기가 오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니 막내 꽃잎 씨가 '앗, 용히 씨, 괜찮아요?' 하고 묻는다. 용히는 '좀 게우고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지겠죠.'라며 (토한 것도 아닌데) 거짓말한다.
그러자 김 과장이 '힘들면 좀 누워서 쉬어. 술 잘 안 받나 보네~ 얼굴이 빨개.' 하고 챙겨 주고, 용히는 '그…래도 될까요? 그럼 잠깐만 누워 있다 오겠습니다.' 한다.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는 컷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있는 와중에 용히 혼자 그들을 등지고 누워서 만족스레 웃고 있다.
용히의 복수는 이런 식이다. 참고로 이 기술은 <삼우실>의 그림 작가가 털어놓은 본인의 경험이라고 한다.
저는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쳤어요. 빨간색 립스틱을 얼굴에 쓱쓱 칠하고 나서 팩트 쿠션으로 두드려주면 얼굴이 벌겋게 되거든요. 손에 묻은 립스틱 잔여물은 목에 발라줬고요. 그러고 자리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술을 덜 권하더라고요.
주말에 걸려 온 상사의 전화에 대응하는 용히의 방법도 배워 보시라. '이렇게까지 야비하게 살아야 하나'라는 제목의 글 부분이다.
한 독자가 아주 요긴한 방법을 일러주었다. 주말에 상사로부터 잦은 전화가 걸려오면 휴대폰을 알루미늄 호일로 말아버린단다. 호일이 신호를 차단해버려 서서히 전화가 끊기는데, 상대방은 단순히 배터리가 없는 줄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직접 실험해 봤더니 이게 웬걸? 통화 연결 후 정말 5초도 안 돼 전화가 끊겼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엘리베이터를 타면 수신이 안 돼 끊기는 원리와 같다고 한다. 전자파가 들어오지 못하게 호일이 실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독자의 말마따나 '이렇게까지 야비하게 살아야 하나' 싶겠지만, 주말을 건드리는 야비함에 비하면야 이 정도는 애교가 아닐는지.
이 만화 속 내 꼰대 캐릭터로는 구 대표, 조 상무, 홍 과장, 진 대리 등이 있는데 여자인 진 대리만 빼고 나머지 셋은 정말... 솔직히 말해 못생겼다.
그냥 못생긴 게 아니라 정말 딱 그런 직위에 있을 법한, 어느 회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하이퍼-리얼리즘의 느낌으로 못생겼다.
이런 꼰대들이 꼰대 짓을 하는 만화를 보고 있자니 나는 왜 퇴근 후 이 좋은 시간에 이거에 이입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싶었다.
골드키위새의 <죽어도 좋아>에서처럼 꼰대 캐릭터가 외모는 멀쩡하다면(사실 백과장 캐릭터는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준수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내 얼빠 기질이 발휘돼서 조금 눈감아 주거나(사실 <죽어도 좋아>를 보면서 백과장이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수많은 진상 짓을 옹호한 적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적어도 눈은 편안했을 것이다.
(<죽어도 좋아>는 이전에 리뷰를 쓴 적이 있다. 2018/06/08 - [책을 읽고 나서] - [웹툰 감상/추천] 골드키위새, <죽어도 좋아>)
근데 <삼우실>에서는 마음도 못난 게 얼굴도 못나서 진짜 짜증이 나더라. 나처럼 예민하신 분들은 이 책 읽으실 때 과몰입하시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나는 좀 과하게 공감을 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다 겪어 봤을 일들이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만화와 글이 모두 들어가 있지만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책이다. 1~2시간 정도면 다 읽을 정도이다.
퇴근 후에 직장 트라우마를 유발하지 않을 정도에서 보고 공감하며 꼰대들의 무례함에서 나를 지키는 호신술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 단행본 마지막에 실린 만화 '#용히 이야기'에서 용히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원래부터 사이다 성격이었던 건 아니에요. 적잖은 회사와 사람들을 거치면서 조금씩 깨달았죠.
내가 '아니오, 못해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 불편한, 불쾌감은 계속된다는 걸.
그래서 결심했죠. 나의 생각을 최대한 표현하기로. 하지만 직접 말로 표혆나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상사들은 되바라졌다는 말로 본질을 흐리곤 하죠. 그래서 나는 조금 우회하는 길을 택했어요.
그게 바로 직장생활 호신술이에요. '응, 안아니야'라고 대신 말해줄 수 있는 행동들.
이 만화를 보고 모든 직장 꼰대들이 불편해하고 예의범절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더불어 이 책을 읽은 독자분들도 자신을 보호하는 기술을 배워 '아니오, 못해요' 또는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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