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Black Balloon(검은 풍선)>(2008)
⚠️ 아래 영화 후기는 <The Black Balloon(검은 풍선)>(2008)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엘리사 다운(Elissa Down)
호주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 주의 한 동네로 이제 막 이사 온 몰리슨 가족. 사이먼(에릭 톰슨 분)과 매기(토니 콜렛 분) 몰리슨에게는 아직 매기 배에 있는 아기를 제외하고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는 찰리(루크 포드 분)는 자폐 스펙트럼상에 있고, 둘째 토마스(라이스 웨이크필드 분)는 그런 형을 잘 돌보는 착한 동생이다. 문제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찰리가 아침에 집을 뛰어나갔을 때 시작된다. 토마스는 형을 붙잡으려고 따라갔는데, 찰리가 달리고 달리다 소변이 마렵다고 어느 가정집에 무작정 들어가 화장실을 쓰는 게 아닌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게 무려 토마스랑 같은 체육 수업을 듣는 예쁜 여자애 재키(젬마 워드 분)네 집이었고, 그 여자애는 샤워 중이었다. 소변을 보던 형을 어떻게든 끌고 나와 집으로 데리고 가긴 했지만 그 여자애는 이미 토마스의 얼굴을 본 후였고, 찰리가 쓰고 있던 ‘원숭이 귀’ 모자까지 떨어뜨리고 왔다. 망했다. 토마스는 형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평범한 사춘기를 누릴 수 없는 운명인 걸까?
이 호주 영화의 감독인 엘리사 다운은 자폐 스펙트럼상에 있는 남자 형제를 둘이나 두었는데, 감독 본인이 (다른 공동 각본가와 같이) 각본을 쓰면서 찰리라는 캐릭터를 특히 ‘션’이라는 자기 남동생에 기반해 구축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불행이나 불평불만, 자기 연민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금 특별한 자신의 형제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시선이 가득하다.
아마 다운 본인이 가장 이입할 만한 역할은 자폐 스펙트럼상에서도 사회성이 낮은 축에 속하고 타인과 유의미한 대화를 전혀 하지 못하는 (또는 않는) 찰리보다는 그를 돌보는 헌신적인 동생 토마스일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잘 보일 기회를 번번이 (본의 아니게) 망치고, 심지어 본인이 그 여자애랑 잠깐 얘기하는 동안 문을 잠가 놓았다고 방에서 대변을 싸서 그걸 바닥에 문대는 형이 아니라. 이 장면의 상황을 조금 설명하자면, 이때 엄마는 임신 중독증이 심해질까 봐 아빠의 극진한 보호 때문에 잠깐 침대에서 쉬는 중이었고, 그래서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 일자리를 가지고 가족을 꾸리는 일 같은 걸 네 형은 절대 하지 못할 거다. 그러니 우리가 네 형이 죽을 때까지 돌봐야 해’라며 찰리를 감싼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제 열여섯 살인데요! 열여섯 살짜리에게 형을 그렇게 돌보라고 하는 건 또 다른 형태의 아동 학대가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이 집 사람들은 다 본성이 착해서 찰리를 짐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토마스가 좋아하는 여자애 재키도 착하고 이해심이 많다. 자기네 반 남자애가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형을 붙잡는다고 자기 집 욕실까지 들어온 게 실질적인 첫 만남인데 그다음에도 그 애를 꺼리거나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이 놓고 간 모자를 갖다 준다? 이건 100% 애초에 토마스에게 호감이 있었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물론 토마스가 좀 멀끔하게 생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재키도 찰리를 마치 자기 혈육처럼 친하게, 잘 대해 주는데 정말 착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이 비교적 잔잔한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이라고 한다면 토마스의 생일날, 토마스네 다섯 가족(그 사이에 막내딸이 탄생했다)과 재키까지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재키 바로 옆에 앉은 찰리가 자기 바지 안에 손을 넣고 자위를 해서 재키가 깜짝 놀라는 사건일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된 재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형이 부끄럽고 미워서 그와 몸싸움을 벌인다. 결국 엄마아빠가 둘을 뜯어 말리는 데 성공하지만 이미 둘은 서로 주먹질을 해댄 후였고 찰리는 눈썹 부근을 꿰매야 했다. 그날 밤, 토마스는 속상한 마음에 울다가 집 밖을 잠옷 차림으로 서성이고 재키와 이야기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따라온 것 같은 형을 발견한다. 결국 둘은 화해하고, 그다음부터 토마스는 형을 더 이해하고 형의 편에 서기로 한다. 아침마다 ‘다, 다, 다’라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나무 주걱으로 땅을 두들겨대는 찰리 때문에 이웃집은 시끄럽다고 불만이 많지만 이제는 토마스까지 거기에 가세한다. 형을 이상한 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이해해 보겠다는 시도다. 그다음으로 영화는 토마스가 형이 다니는 특수 학교에서 하는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공연하기를 거부하는 찰리의 친구 대신 같이 춤을 춰 주는 것, 그리고 같이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 둘의 형제애가 더 깊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맛도, 소재도 없지만 그 담백하고 슴슴한 맛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 키우고, 청소년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도 보여 주고, 가족의 사랑이란 주제까지 다루니 완전 일석삼조 아닌가. 감독을 놀라게 할 정도로 ADHD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찰리를 연기한 루크 포드의 연기도 대단하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호주 영화이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라고 권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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