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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조나 레러, <지루하면 죽는다>

by Jaime Chung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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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조나 레러, <지루하면 죽는다>

 

 

인간이 왜 미스터리가 담긴 콘텐츠를 좋아하는지를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으로 설명해 주는 논픽션.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미리 밝혀 두자면, 저자의 목표는 ‘왜 인간이 미스터리를 좋아하는가’, 또는 ‘미스터리를 품은 콘텐츠가 왜 사람의 마음을 끌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통찰을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미스터리가 담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지’가 아니다. 미스터리를 담은 책이나 영화 등의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1장 ‘미스터리 전략 1 - 예측 오류의 짜릿함 선사하기’에서 저자는 한 실험을 통해 ‘인간은 질서(=익숙함)가 있는 참신함’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인간은 깜짝 반전과 긴장감을 좋아하지만, 질서와 마침표를 갈망하기도 한다. 미스터리 박스의 묘미는 균형에 있다. 너무 많이 보여주면 지루해지고, 너무 적게 보여주면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마음을 접는다. 심리학자 대니얼 벌린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호기심은 U자를 뒤집은 곡선을 그린다’는 이론을 펼쳤다. 벌린은 1960년대 후반에 고전적인 심리학 연구들을 진행했다. 사람들에게 크기가 같은 사각형이나 선으로 그린 태양 등 여러 단순한 도안을 보여주고, 그다음에는 비대칭적이거나 불규칙한, 혹은 복잡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무작위성과 부수적인 디테일을 살짝 추가한 그림들이었다. 그런 다음 벌린은 피험자들에게 각 그림의 만족도와 흥미를 평가하고, ‘아주 보기 좋다’부터 ‘아주 보기 싫다’로 등급이 나뉜 쾌락적 가치의 정도를 표시하게 했다. 또한 피험자들이 각 도안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측정했다. 이 실험의 결과, U자를 거꾸로 뒤집은 모양의 그래프가 완성되었다.

실험 결과 사람들은 단순하고 익숙한 형태에 금세 싫증을 느꼈다. 직선 몇 개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무작위적이고 엉뚱한 형태도 좋아하지 않았다. 쾌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관심 버튼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너무 모르지는 않을 때’ 작동했다. 벌린의 공식에 따르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단순하면서 참신하거나, 혹은 복잡하면서 익숙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즉 인간은 미스터리(시각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좋아하지만 해독할 수 있는 (혹은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나는 딱히 미스터리가 많은 콘텐츠/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읽은 게 아니어서, 그냥 저자가 제시하는 이런저런 실험 결과나 일화를 흥미롭게 읽어나갈 뿐이었다. 개중에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들었고 공감한 인용문은 이거다. 콘텐츠 속 등장인물에 관한 맥락인데, 그냥 우리 평범한 인간들에게도 해당된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개인 하나하나가 모두 나름대로 알 수 없는 작은 미스터리구나! 그걸 새삼 느껴서 정말 좋았다. 인간은 그리 쉽게 판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월터 미셸은 상황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심리학자다. 그는 실패를 통해 연구의 돌파구를 찾았다. 미셸은 1960년대 초에 평화봉사단에 지원한 자원봉사자를 선별하는 데 쓰일 성격 검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22 개발도상국의 곤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셸은 최근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원봉사자들의 성향을 다각도로 측정했다. 그런 다음 그들이 나이지리아에서 교사로 생활하며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후속 관찰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거금을 투자한 성격 검사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조차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짐작보다 훨씬 예측 불가능했다. 인간의 성격은 계속 미스터리로 남았다.

미셸의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는 심리학자 유이치 쇼다와 함께 뉴햄프셔에서 열린 여름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을 조사한 것이다.24 당시 학계의 대세는 공격성을 고정적인 속성으로 간주했다. 그러니까 집에서 공격적인 아이는 학교나 다른 곳에서도 공격적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미셸과 쇼다의 관찰에 따르면 아이들의 행동은 맥락과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 상당히 달라졌다. 연구를 위해 77명의 캠프 교사들이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기록했다. 어떤 아이들은 친구들과는 싸움을 벌였으나 교사들의 말은 잘 들었다. 반면 어른들의 지적에는 발끈하지만 친구들의 도발에는 침착하게 대처하는 아이도 있었다. 달라지는 건 공격성뿐만이 아니었다. 외향성, 친화성, 투정 부리기 같은 특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성격 이론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과학계의 정설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4체액설을 정립한 이래 우리는 고정적이고 정적인 속성에 따라 타인을 해석해왔다. 인간은 황담즙과 외향성과 친화성에 따라 규정되는 평면적인 존재였다(쓰는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MBTI의 기본 개념 역시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이런 사람이니,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미셸과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그보다 훨씬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선구자이자 심리학자인 토드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들의 ‘대체적인’ 성향이나 ‘기본 성격’을 감안하면 방향을 잃기 쉽다. 만약 당신이 오늘 전전긍긍하며 소심하게 운전을 했다면, 내일도 그렇게 운전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동네 술집에서 친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좋아하는 곡을 노래할 때는 조금도 전전긍긍하지 않고 소심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고유한 존재가 된다.

 

나는 책이나 영화 리뷰를 쓰면서 ‘스포일러’ 경고도 꼭 다는데, 저자가 스포일러에 관해 제시한 견해가 꽤 인상적이어서 여기에서 나누고 싶다. 요지는 ‘어떤 콘텐츠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안다고 해서, 그 스포일러가 재미를 경감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얼핏 들으면 ‘엥 그럴 리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의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미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 그걸 새롭게 리메이크한, 또는 새로 해석한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에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아는걸.’ 하며 그걸 감상하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걸 어떻게 연출하고 여러 세부 사항을 어떻게 바꿨는지, 새로운 감각으로 만들어냈는지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한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최근에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2023)가 아닐까. 설마 이거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중학교를 안 나온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걸 다 아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재미는 반감되지 않는다.

사실 스포일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스포일러에 좌우되지 않고 관객이 정보에 얼마든지 노출되어도 상관없이 성립되는, 한계 없는 게임이다. 이것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본인 것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우리는 스포일러 경보가 쉴 새 없이 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혹은 사전 경고도 없이 스포일러를 남발하는 리뷰를 지뢰밭처럼 피해 다녀야 한다. 스포일러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면 이야기가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공개되는 비밀이 『해리 포터』의 재미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 결과가 있다. 스포일러의 파괴력이 생각보다 미미하다는 과학적 증거가 나온 것이다. 《사이콜로지컬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 결과에서 조너선 레빗과 니컬러스 크리슨펠드는 학부생 수백 명에게 열두 편의 서로 다른 단편소설을 보여주었다.9 단편소설의 장르는 아이러니한 반전이 있는 작품(예를 들면 체호프의 「내기」), 탐정소설(애거사 크리스티의 「체스 게임A Chess Problem」), 그리고 존 업다이크 같은 작가의 ‘문학적인 이야기’ 이렇게 세 종류였다. A군의 피험자들은 각 작품을 스포일러 없이 원작 그대로 읽었다. B군의 피험자들은 마치 작가가 직접 나서기라도 한 것처럼 스포일러가 주도면밀하게 삽입된 버전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C군의 피험자들은 서문에 스포일러가 공개된 버전을 읽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반전이 공개되었으니, 거의 모든 피험자가 장르를 불문하고 서문에 스포일러가 공개된 버전을 좀 더 재미있게 읽었다. 결말을 모르는 데 묘미가 있는 줄 알았건만, 이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긴장감이 오히려 읽는 재미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좋은 이야기를 더욱 훌륭한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쉬운 방법은 처음부터 스포일러를 공개하는 거였다.

하지만 근대 이전의 독자들이라면 크리슨펠드의 스포일러 연구 결과가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결말이 예견된 이야기들이 대중문화의 토대를 이뤘으니 말이다. 호메로스의 청중은 트로이 전쟁의 승자가 누군지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알았고, 제인 오스틴의 독자들은 그의 작품이 결혼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조지 루카스도 스포일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이 개봉하기 1년 전, 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말미에 데스 스타가 파괴될 거라고 직접 밝혔다. 크리슨펠드는 이렇게 말했다. “장르 소설은 태생적으로 전개가 아주 뻔하죠.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끝이 좋으면 다 좋아』에서 제목으로 내용을 미리 알려줬다고 투덜댄 사람이 있었을까요?”

스포일러가 이야기의 재미를 망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크리슨펠드에 따르면 상상의 세계의 위용이 불확실한 결말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상의 이야기를 보거나 읽을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 세계 안에 들어갑니다. 불신은 묻어두고 존재하지 않는 공간, 어쩌면 가능하지조차 않은 공간에 감정을 이입하기로 해요. 무슨 뜻인가 하면, 외계인이든 용이든 뭐든 믿기로 마음을 먹으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안다고 해도 계속 몰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가상의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비상한 재주를 발휘할 때면 스포일러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스포일러 때문에 더 재밌어지는 이유는 뭘까?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하자면, 스포일러를 알고 나면 작품 속의 더욱 중요한 미스터리로 관심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코폴라가 〈대부〉에서 자막을 생략하여 인물들의 섬세한 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했던 것처럼 말이다. 혹은 『해리 포터』의 경우를 보라. 스네이프의 정체를 알고 나면 우리는 그의 복잡한 동기를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평면적이던 숙적이 입체적인 인물로 둔갑한다. 크리슨펠드는 이렇게 말했다. “스포일러로 인해 작품이 더 흥미로워지는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더 의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그 외의 모든 것, 우리를 가상의 세계로 유혹하는 그 알쏭달쏭한 디테일의 재미를 느낄 여유가 생기죠.” 우리는 스포일러가 미스터리를 감소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걸작의 경우는 그 반대다.

플롯은 한계가 있는 게임이다.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하지만 어떤 작가들은 그 제한적인 구조 안에서 무한함을 아우르는 방법을 찾는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제시한다. 제이슨 핼록은 말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건 줄거리를 잊어버려서가 아니에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다시 봐도 경탄을 자아내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죠. 항상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고, 내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생각해 보면 이게 많은 콘텐츠에도 적용되는 말인 게, 예를 들어 내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고 치자. 개중에 흔히 등장하는 트로프(’트로프’ 용어 설명은 이 글 참조) 중 ‘단짝 친구’ 트로프를 좋아해서 그 키워드 위주의 작품을 골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짝 친구가 연인이 된다는 큰 틀, 결말을 알아도 재미는 반감되기는커녕, 오히려 내 기대를 북돋어 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작품이 됐든 스포일러에 그렇게 예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추리 소설 또는 탐정물만이 ‘미스터리’가 아니고, 어떤 이야기든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 또는 미스터리로 가득 차 흥미진진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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