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진 킬본, <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법: 광고, 중독 그리고 페미니즘>
다른 글에서도 종종 말해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광고를 싫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광고를 아주 창의적인 사람들이 하는 멋진 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창의적인 사람들이 창의성을 다해서 하는 게 고작 대중에게 두려움을 심어 줘서 자기네 물건을 파는 거라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은 내가 누누이 말해 왔던, ‘광고는 우리에게 해롭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1999년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예시로 드는 광고가 좀 예전 것이긴 하지만, 어차피 미국 광고라서 한국 독자에겐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현재 2020년대 최근 광고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낯설 테니까).
저자가 광고에 관해 하는 말 중에 핵심이자, 내가 광고를 싫어하는 이유를 간단히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을 인용하자면 바로 이거다. “연인은 물건이 되고 물건은 연인이 된다.” 광고는 인간을 대상화, 사물화하고, 반대로 물건(=광고가 팔려고 하는 그 제품)을 연인으로 만든다. 그 물건을 가지면 뭐든 다 잘될 것 같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광고가 인위적인 갈망과 욕구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진짜 욕구, 인간적인 욕구를 악용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광고주들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있으며 그 지식으로 우리를 이용한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에 대한 부도덕하고 퇴폐적인 시각을 조장한다. 우리는 대부분 오래도록 변치 않는 친밀하고 헌신하는 인간관계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어떤 상품을 산다 해도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상품과 연관시키고 그 상품이 우리의 소망을 이뤄줄 거라고 거짓 약속을 하는 광고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광고의 세계에서 연인은 물건이고 물건은 연인이다. 이런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무수한 메시지들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을 상품과 연결시키고, 인간을 도구화하고, 가장 감동적인 순간과 인간관계를 폄하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상품을 파는 데 이용한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욕구는 고급 자동차를 팔기 위한 미끼가 된다. 변치 않는 결혼 생활을 바라는 마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팔기 위한 미끼가 된다. 아버지와 집 나갔던 딸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재회의 드라마로 꾸민 것은 통신사를 광고하기 위해서다. 자연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소비의 대상이거나 뭔가를 팔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 인용문 다음에 나오는 예시는 여러분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녀나 배우자 등 소중한 사람과의 활동에 드는 비용을 열거한 후, 그때 느끼는 감정이나 그 귀한 순간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priceless)’라는 말로 끝을 맺는 ‘마스터카드’의 광고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6stXKGuHo
이 광고에 관해 저자는 이렇게 썼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말할 때조차 광고에서는 어떻게든 가격을 매긴다. 한 텔레비전 광고는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장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경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에 가격을 표시한다. 입장권, 간식, 사인 받은 야구공 등. 하지만 11살 아들과의 진심 어린 대화는 ‘가격을 매길 수 없음’이라고 나온다. 이 시리즈의 다른 광고에서도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돈이 드는 활동들과 연관시킨다. 그 광고가 보내는 표면상의 메시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이지만, 숨어 있는 메시지는 당연히 가격을 매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용카드로 살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 광고는 소중한 순간에 느끼는 감정(아들과 통했다는 느낌, 아들에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 주었다는 느낌)에 가격을 매길 뿐 아니라 ‘돈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자본주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과연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하는 귀한 순간을 누리는 데 있어서 꼭 큰돈(위 광고에 나오는 금액만 대충 계산해도 100달러 이상이다)이 있어야 하는 건가? 아이들이 기억하는 건 아빠가 사준 번쩍번쩍한 새 물건이 아니라 아빠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 준다는 느낌일 것이다. 꼭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아빠가 (아니면 다른 양육자가) 마음을 내서 시간을 마련하고, 그 시간 동안 아이에게 집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저자 말대로, 광고에서 자본주의를 빼놓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광고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건을 파는 것이므로 인간관계를 표현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제를 모르는 이런 소비주의는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자원도 고갈시킨다. 우리를 필연적으로 나르시시즘과 유아론唯我論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와, 아이들과,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도구화와 착취 외의 다른 방식은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이 광고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광고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저자는 이렇게 썼다.
알고 보면 광고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런 착각 때문에 광고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선전으로 인식되지 않는 선전이다. 광고가 유치하고 하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방심하고 덜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 재미로 만든 것이고 말도 안 되는 거야’라며 웃고 때로는 코웃음 치는 동안 광고는 효과를 발휘한다.
광고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왜 기업들이 광고에 그렇게 큰돈을 쏟아붓겠는가? 언론사들은 광고주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사실도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워한다. 가장 단적인 예가 담배 또는 술 광고다. 술은 그래도 적절히만 먹으면 괜찮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담배는 정말로 백해무익하다. 사망하거나 담배를 끊은 흡연자들을 대체하려면 미국에서만 매일 어린이 3천 명이 흡연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물론 미국 기준 통계다), 왜 하필 어린이냐면 흡연자들의 90퍼센트가 18살이 되기 전에 담배를 시작하고, 60퍼센트는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담배 산업이라는 게 계속 유지되려면 소비자들이 계속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피해자를 끊임없이 양산해 내야 유지되는 산업이라는 게 정말 유지될 가치가 있는 걸까? 어쨌거나, 담배 산업은 전통적으로 담배의 소비자였던 남성 외에 이제 여성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담배를 피우는 게 ‘쿨’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꾸며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이 흡연을 시작함으로써 남성과 유일하게 평등해진 것은 폐암 발병률이다.” 담배 산업은 자기 소비자들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수익을 내고 싶을 뿐이다. 이래도 광고가 매력적으로 보이는가?
이 책 리뷰에서 깊이 다루진 않았지만, 저자는 특히 여성과 관련해 광고가 어떻게 그들을 유혹하는지, 음식, 술, 담배 등 다양한 제품/산업군과 연관지어 실제 광고의 예를 들며 설명한다. 자신은 광고에 별로 영향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비판적인 사고를 견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광고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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