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속죄(Atonement)>,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 등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소설이다.
이 책 역시 엠마 톰슨(Emma Thompson)과 스탠리 투치(Stanley Tucci)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곧 개봉한다고 한다.
이 영화가 엠마 톰슨 연기 인생 중 최고라는 말을 들은 데다가 원작 소설의 줄거리가 흥미로워서 곧바로 찾아서 읽게 되었다.
이 소설도 영화용 각본 작업을 이언 매큐언 본인이 했던데, 저번 <체실 비치에서>처럼 이상하게 손대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2018/08/22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On Chesil Beach(체실 비치에서, 2017) - 섹스 없는 사랑, 가능할까?)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책 제목인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는,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아동법' 조항에서 따온 것이다.
주인공인 피오나 메이는 59세의 고등법원 판사이다. 그녀는 한평생 사법부에 헌신했고 그 덕분에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
본문 속 표현처럼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도 피오나 메이는 찬탄의 대상"이었고, 일이 바쁘긴 하지만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그녀는 기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35년간 같이해 온 남편 잭에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젊은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와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것.
다시 말해, 35년간 바람도 피우지 않고 같이 살아 왔으니 이제 한 번쯤은 살짝 눈을 돌려 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피오나는 남편의 제안에 충격을 받고, 일에 더욱더 파묻혀 이 무너져내리는 결혼 생활을 무시하려, 최소한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애쓴다.
판결문을 고쳐 쓰고, 나중에 인용될 수 있는 완벽한 정의를 내리려 노력한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한 유대인 부부의 사건에서 아동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판결을 내린다.
그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나 종교와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가 자녀의 치료 과정에서 필요한 수혈을 거부했고, 이에 병원 측에서 수혈을 허락해 달라고 급히 재판을 요청한 것이다.
재판일, 그녀는 양측 의견을 듣고 나서는 '본인(환자인 17세 소년 아담 헨리)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후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만남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한 채 병원으로 향하는데...
남편의 '한 번만 다른 여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에 피오나와 남편의 관계가 틀어지고(사실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지도 오래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열린 관계(open relationship)'를 갖자고 제안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 충격으로 더욱더 일에 매진하게 된 피오나가 '과연 재판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의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 무척 안타까우면서 아주 공감이 된다.
아동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이 그녀의 일이지만, 샴 쌍둥이 중 한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쪽을 죽이는 것이 정말 공정한 일인가, 이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을 전공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피오나가 느끼는 곤혹감, 회의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이런 문제에는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서가 아닐까.
한동안 피오나는 그 재판의 후유증으로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별 관심도 감정도 없이 업무를 해나가며 아무에게도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 지나치게 예민해졌고, 자신의 몸이나 잭의 몸을 더는 역겨움 없이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하고많은 재판 중 이 한 건이, 그 슬픔이, 오장육부를 다루는 세세한 정보들과 요란한 대중의 관심이, 법관으로 이 정도 경력에 이른 사람을 이렇게 내밀하게 뒤흔들었다고 어떻게 그에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건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피오나의 일부는 한동안 불쌍한 매슈와 함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처치해버린 사람, 서른네 장의 우아한 글로 설파하여 그 아이의 존재를 지워버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머리가 붓고 심장이 수축하지 않는 매슈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음을 논외로 하더라도. 피오나는 비이성적인 면에서 대주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면의 이런 위축을 인과응보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라지고 나서도 상흔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칠 주 하루가 지난 다음에도.
피오나는 차라리 몸이 없다면, 육체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떠돌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오나가 극도의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는 부분을 읽다 보니, 당사자들끼리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남에게 '해결해 주시오' 하고 내미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행위로도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정을 대신 떠맡은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더라도 분명 둘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법을 제시할 수는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책임과 권한을 양도하는 것일까. 아무리 지식과 이성을 최고로 갈고닦은, 무사공평한 판사라 하더라도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
판사들은 최고의 권한 및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들조차도 무력감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짠해졌다. 이전에는 판사들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포인트는 종교와 법이 엮일 때 판결의 어려움이다. 판사는 법의 측면에서 그 어떤 종교적 색채도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소위 '사이비'라고 여겨지는 종교라고 하더라도 법이 예컨대 '이 사람은 사이비 종교를 믿으니까 아이를 맡아 키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종교에 대해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이 법과 얽히는 경우는 생기게 마련이다. 피오나가 맡게 되는 사건들의 당사자처럼.
세속적인 것을 피하는 유대교인이 자신의 딸을 남녀를 분리해 교육시킬 뿐 아니라 유행에 따른 옷차림,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금지하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어머니의 뜻대로, 딸들이 열여섯 살이 넘어도 학교에 다니고, 아이들이 원한다면 대학에도 진학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주장대로, 딸들이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영적인 삶을 조롱하고 대중문화가 소녀와 여자를 폄하하는 바깥세상'에 비해 '정체성이 분명하고 세대를 거듭하며 삶의 방식이 증명된' 환경에서 자라게 할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 사건은 또 어떤가.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혈을 금지할 것인가, 아니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혈을 허락할 것인가?
이렇게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는 거의 철학의 영역이 아닌가 싶은데, 이걸 판사들은 현실에서 마주해야 한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언 매큐언은 이 책을 쓰기 전, 법조계를 조사하기 위해 법조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분량의 판결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체실 비치에서>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주인공을 각각 현악 사중주단 리더와 교향곡 작곡가로 그리기도 했는데, 이번 소설에도 피오나가 말러(Mahler)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도 아마 클래식 곡들이 여러 곡 흘러나오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조만간 개봉한다고 하니 보고 나서 다시 영화 감상을 또 쓰겠지만 일단은 이 원작 소설도 좋았다.
법적 또는 철학적인 고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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