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감독: 레이첼 리 골든버그(Rachel Lee Goldenberg)
영화는 미주리 주의 한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시작된다. 아이비 리그를 목표로 할 만큼 똑똑하고 예쁘며 나름대로 학교에서 '잘나가는' 17세 소녀 빅토리아(Victoria, 헤일리 루 리차드슨 분)는 초조한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실수로 임신 테스트기는 그녀가 있던 화장실 칸막이 아래를 통해 화장실 정중앙으로 미끄러져 가 버리고 만다.
누가 이걸 보기 전에 임신 테스트기를 잡아 와야 하는데, 아 망했다! 누가 들어왔다!
목소리로 보아 하니 이건 베일리(Bailey, 바비 페레이라 분)다. 빅토리아와 베일리는 어릴 적에 친한 친구였는데, 지금은 소원한 사이가 됐다.
아마 둘의 성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빅토리아가 모범생이라면 베일리는... 자유로운 영혼 또는 반항아라고 할까. 두 소녀들의 머리 색깔이 다르듯 성격도 확연히 다르다.
어쨌거나 베일리는 (아직 이 임신 테스트기가 누구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은 차가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도와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이미 베일리와 소원한 사이. 베일리는 빅토리아가 화장실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짝 놀리지만, 그래도 비밀은 비켜 주기로 한다.
이때 갑자기 화장실에 빅토리아를 찾는 여학생이 들어오고, 베일리는 그 임신 테스트기를 들키지 않게 몰래 숨겨 가지고 나가 학교 쓰레기 폐기장에 던져 버린다. 그러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어쩌다가 학생들이 그걸 발견하고, 빅토리아의 친구들은 '임신한 여학생이 누굴까' 알아내는 데 몰두한다.
물론 그게 자기라는 걸 밝힐 수 없는 빅토리아는 당장 계획 짜기에 돌입한다. 미주리 주에서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은 없다. 가장 가까운 곳은 뉴 멕시코 주에 있는 앨버커키란 곳.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밤새, 그리고 내일 하루 종일 달려서 일요일 아침에 앨버커키에서 수술을 받고 저녁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다만 문제는, 빅토리아가 운전은 할 줄 알지만 몰 수 있는 차가 없다는 것. 차가 있는 사람이 누구지? 음... 베일리? 베일리에게 부탁해 봐야 하나? 이미 멀어진 사이인데 부탁하면 들어줄까?
제니 헨드릭스(Jenni Hendriks)와 테드 카플란(Ted Caplan)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위 시놉시스에서 볼 수 있듯이, 미성년자의 임신과 임신 중절술을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즐긴 것은,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임신중절이 잘못됐다, 생명이 소중하다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에 대한 영화, TV 쇼, 소설, 또는 어떤 미디어든 '생명은 소중해요!'를 외치며 임신중절을 생각하던 여성이 초음파 검사를 하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는 '아, 이것도 생명인데 내가 이것에게서 생명을 빼앗으려 했구나' 하고 펑펑 우는 묘사 따위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진짜 너무 구리다는 말밖에 해 줄 말이 없다.
(이 영화에도 나오지만) 소위 '생명에 찬성하는(pro-life)' 사람들, 그러니까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코딱지만 하고 발달 중인 태아는 '생명'으로 보면서, 이미 발달된 존재인 여성은 '생명'으로 보지 않는 건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냥 원치 않으니까 임신중절을 하겠다는 건데, 낳기 싫다는 애 낳으면 자기네들이 키워 줄 건가?
자기네들이야말로 책임 질 수 없는 소리만 잔뜩 해대면서 왜 여성의 기본 권리인 생식의 자유를 제한하려 드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흥분했지만 어쨌든 내가 말하려던 건 이거다. 이 영화에는 그런 감상적인 죄책감 따위가 없어서 좋다는 것.
이 여성은 현재 아이를 낳을 수 없고 키울 수 없으니 낳지 않는 것이다. 그냥 그만큼 간단한 건데. 거기에다가 온갖 갬성을 갖다 붙여 '흑흑, 이 아이를 죽이려 들다니 내가 살인마야, 내가 나빠' 이 ㅈㄹ을 하지 않고 그냥 명확하게 '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중절을 해야 해' 하고 딱 똑똑하게 행동하는 빅토리아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아, 애초에 어린 나이에 발랑 까져서 임신한 게 어떻게 똑똑한 거냐고?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쯤에 빅토리아 임신하게 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참고로 빅토리아 잘못은 아니다.
10대에 벌써 섹스를 하는 게 발랑 까진 게 아니면 뭐냐, 그런 애가 뭐 공부 좀 잘한다고 다 똑똑한 거냐고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피임도 알아서 잘한다면 10대가 섹스를 하지 못할 이유는 뭔가.
18세, 19세, 20세, 또는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이 완전히 성숙해져서 자기 몸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 하는 애를 말릴 방법도 없는데(뭐 정조대라도 차게 만들 건가? 그럼 남자애들은?), 그럴 바에야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잘 돌보도록 피임 교육이나 확실하게 시킨 상태에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책임 질 수 있는 만큼 즐겨 봐라~ 하는 게 낫지.
이 영화를 보면서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2020,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가 떠올랐다.
<전혀 아니다...>도 임신중절을 선택한 미성년자 소녀가 부모님 몰래 친구와 같이 임신중절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이야기라는 점이 닮았다.
비록 이 영화(<언프레그넌트>)가 <전혀 아니다...>에 비해 밝고 가벼운, 코미디 느낌이 강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소녀들의 길이 힘들다는 점은 똑같다.
물론 영화상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중간중간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거야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짜 임신중절을 선택한 실제 소녀들의 삶이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더 쉽지는 않을 거다.
빅토리아의 말대로,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엿 먹어라!"다. "미성년자가 아기를 낳는 데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 없는데, 왜 임신중절에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한 거야?"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이다.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게 임신중절보다 더 큰 책임, 자본, 에너지,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그렇다면 미성년자의 임신중절보다 출산을 더 심각하게 여기고 더 사회 제도적인 제재라든지 도움이랄지 그런 게 필요하지 않나?
애는 뭐 낳아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크냔 말이다.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애를 낳게만 해 놓고 그 애를 잘 키우게 돕는 데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자기 일이 아니니까 낳으라고 강요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두 소녀의 로드 트립은 두 소녀의 우정을 다시 굳건히 해 준다. 빅토리아가 남친 케빈(Kevin, 알렉스 맥니콜 분)을 대하는 태도도 아주 똑쟁이다. 스포일러가 되니 말은 하지 않겠다만 위에서 언급한, 빅토리아가 임신하게 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베일리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발견, 아니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걸 즐긴다고 해야 하나? 그런 과정도 보여 줘서 좋았다.
근데 베일리가 반한 그 상대... 너무 멋있는데 영화 속 분량이 너무 조금이라 내가 다 아쉬웠다. 내가 봐도 반하겠던데... 좀 더 등장시켜 주지...
소녀들의 우정 이야기 또는 로드 트립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주리 주를 비롯해 미성년자의 보호자 동의 없는 임신중절술을 막는 주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여성의 생식권을 침해하는 이들 모두 엿 먹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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