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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전성진,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by Jaime Chung 2024.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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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전성진,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나는 비록 영어 이외의 외국어에 큰 관심은 없지만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으나, 아직도 정관사와 격 변화를 못 외웠다) 외국어와 관련한 에세이는 재미있게 잘 읽는다. 외국어, 즉 언어는 어렵지만 문화를 배우는 건 재미있게 느껴져서다. 독일어와 관련해서는 이진민의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어와 관련해서는 곽미성의 <언어의 위로>, 이탈리어는 역시나 곽미성의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를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딱히 독일에 대해 엄청난 의지나 열정을 가지고 독일에 온 것 같진 않다. 애인(참고로 저자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자연스럽게 밝힌다)이 독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애인을 따라 독일로 왔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음식 잡지에서 2년을 일하다가, 애인이 ‘나는 독일에 미술 대학을 가려고 한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사랑에 미쳐 있기도 했고 앞으로 진로가 불투명했던” 저자는 단박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저자는 베를린에 왔다. 진정한 사랑꾼! 저자의 전공이 국어국문학과 외식조리학과이다 보니 베를린에 와서도 외식업계에서 일한 듯하다.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왔다거나, 음식점에서 매니저로 일했다는 얘기가 종종 나온 걸 보면. 음식에 대한 칼럼도 썼고.

그래서일까, 각 장(章)에는 그 에피소드와 관련한 레시피가 소개된다. 예를 들어 새로 살 곳을 구하러 집을 보러 다니다가 나오는 길에 슈파겔을 발견한 에피소드 끄트머리에는 ‘홀랜다이즈소스와 베이컨을 곁들린 삶은 슈파겔’ 레시피가, 저자가 약 2년간 같이 산 룸메이트 요나스를 처음 만난 에피소드에서는 ‘요나스의 카다멈 커피’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 식인데, 이게 굉장히 귀엽다. 예를 들어서 ‘요나스의 카다멈 커피’의 다섯 번째 과정은 (청소를 잘하지 않는 요나스처럼) “설거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 밀쳐두고, 밀크 초콜릿을 곁들여 낸다.”라고 되어 있다.

또 귀여운 거 하나를 보자면, ‘되너 케밥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다. 일단 되너 케밥이 뭔지 설명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되너 케밥은 베를린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인데, 저자의 룸메이트 요나스는 “베를린이 되너 케밥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되너 케밥은 베를린에서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이다. 높이가 3에서 5센티미터 정도 되는 도톰한 튀르키예식 플랫 브래드인 피데(Pide)를 갈라서 사이에 고기와 각종 채소, 소스를 넣어서 만든다. 되너 케밥에 쓰이는 고기는 주로 소, 양 혹은 닭인데 양념한 생고기를 차곡차곡 쌓아 익힌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커다란 칼로 얇게 포를 떠 먹기 좋게 잘라 빵 사이에 끼워 넣는 게 특징이다. 한국으로 치면 저렴하면서도 든든하게 먹기 좋은 길거리 토스트 같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의 되너 케밥은 한국에서 파는 케밥과 차이가 있다. 우선 피데라는 빵이 가장 다르다. 처음 피데를 먹었을 때 베트남식 바게트를 떠올렸다. 베트남식 바게트는 겉껍질은 바삭하면서 속은 부드럽고 반죽에서 가벼운 단맛이 난다. 피데도 그렇다. 중간 중간 박힌 참깨 향이 진해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단맛이 일품이다. 보통 약 30센티미터 지름의 피데를 네 등분한 조각으로 되너 케밥 한 개를 만들지만 가게에 따라서 작은 사이즈의 타원형 피데 한 개로 케밥 하나를 만들기도 한다. 래퍼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줄을 서서 먹었던 가게 ‘무스타파 채소 케밥(Mustafa’s gemuse Kebab)’이 베를린의 대표 케밥 전문점이다. 드물게 직접 반죽한 피데로 되너 케밥을 만드는 곳도 있는데 가격은 비싸지만 값보다 더한 맛이 난다.

채소는 주로 생양상추, 양파, 오이, 토마토를 쓰는데 종종 튀기거나 구운 파프리카, 주키니, 감자를 넣어주기도 한다. 소스는 매운맛, 마늘, 허브 세 가지가 기본이다. 이것도 가게마다 좀 다른데 베를린에 처음 왔을 때 살았던 집 앞 되너 케밥 집에는 소스가 열다섯 가지가 있었다. 요거트, 망고, 마요네즈, 토마토, 바질, 민트 등 소스가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진열되어 골라 먹는 맛이 있었다.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우리가 알고 있는 케밥의 두 배는 된다. 손바닥 한 뼘 되는 빵에 온갖 재료를 꾹꾹 눌러서 쑤셔 넣는데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침이 고인다. 기본 재료를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보통은 추가 비용 없이 넣어준다. 주로 튀르키예 이민자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형제의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한국처럼 인심이 있다. 물론 선을 살짝 넘는 농담을 하는 점도 비슷한데 나는 향수가 느껴져 마냥 싫지는 않다.

원론적으로 되너 케밥은 튀르키예의 음식이다. 되너 케밥에서 되너(Döner)는 돌아가다는 의미의 튀르키예어 돈멕(dönmek)에서 왔고, 케밥(Kebab)은 튀르키예어로 구운 고기를 뜻한다. 튀르키예의 원조 되너 케밥은 세로로 긴 꼬치에 고깃덩어리를 꽂아 구운 것으로 부유한 튀르키예인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패스트푸드 형태의 현대 되너 케밥은 다르다. 유럽 내 튀르키예 되너 제조 협회(Verein türkischer Dönerhersteller in Europa, ATDiD)에 따르면 샌드위치 형태로 먹는 되너 케밥은 1972년 베를린 동물원역 맞은편 가판대에서 카디르 누르만(Kadir Nurman)이라는 튀르키예 이민자에 의해 탄생했다고 한다. 카디르 누르만은 1960년에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면서 서독의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튀르키예, 모로코, 그리스 등에서 국가 간 협약을 맺어 노동자를 초청한 손님노동자(Gastarbeiter)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도시 복구에 정신이 없는 독일의 노동자 무리를 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되너 케밥을 만들었다.

 

자, 이제 ‘되너 케밥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으로 돌아가자. 되너 케법을 즐기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현금(신용카드가 되는 곳이 거의 없다)”과 “아재 농담을 견딜 만큼 강한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01 마음에 드는 되너 케밥 전문점을 골라서 들어간다.
02 음료 냉장고에서 망고맛 아이란(Ayran, 튀르키예 요거트 음료)을 꺼내 주문대 앞으로 간다.
03 되너 케밥을 주문하고 음료도 계산대 위에 올려서 같이 구입한다.
04 소스는 마늘과 매운맛을 고른다. 채소는 토마토를 좀더 넣어달라고 하고 웃으며 살짝 부탁하는 표정을 짓는다.
05 되너 케밥이 거의 완성됐으면 분쇄한 염소 치즈(Beyaz peynir)와 레몬즙을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염소 치즈는 때에 따라 값을 받기도, 안 받기도 하기 때문에 추가 비용이 있다고 하면 레몬즙만 뿌린다.
06 완성된 음식을 받는다. 모든 과정 중에 아재 농담을 하면 상황에 따라 반응한다. 직원에 따라 장단을 잘 맞추면 가끔 공짜 아이란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인종차별을 당할 수도 있으니 눈치껏 잘 판단한다.

 

한 가지 더 놀라운 독일의 식문화를 알려드리자면, 일단 파인애플 피자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잠시 귀를 막… 아니 다음 문단을 읽지 않고 건너뛰시라. 요나스는 ‘토스트 하와이’라는 음식을 소개하는데, 파인애플 피자처럼 파인애플이 들어간다. 그것도 토스트, 즉 식빵 위에!

요나스는 자주 토스트 하와이를 준비했다. 일리아스가 좋아하는 메뉴기도 했고, 건강식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식빵, 햄, 통조림 파인애플, 슬라이스 체다치즈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요리다. 물론 건강식은 전혀 아니지만.

토스트 하와이는 1955년 서독의 유명 TV쇼에 출연한 요리사 클레멘스 빌멘로드(Clemens Wilmenrod)가 개발한 요리였다. 서독에 주둔했던 미군의 영향을 받은 레시피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당시에 토스트 하와이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음식이었다. 전통적인 독일식 발효빵이나 소시지, 감자 요리가 아니라 식빵과 통조림 파인애플(레시피에 따라 통조림 체리가 더해지기도 했다)로 만든 이국적인 요리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서독 지역의 일상적인 가정식이었으며 1980년대 들어서는 술집이나 볼링장에서 팔기도 했다. 이리도 힙했던 메뉴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추억의 요리가 되었다.

토스트를 만드는 요나스를 구경하기 위해 주방에 가면 토스트용 식빵이 오븐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요나스는 식빵 사이즈에 딱 맞는 동그란 햄을 차례차례 올린다. 햄 위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기가 딱 맞는 통조림 링 파인애플을 잘 맞춰 놓는다. 링이 아닌 조각 파인애플은 안된다. 당도도 다를 뿐만 아니라 토스트 하와이의 특유의 모양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다른 옵션은 없다. 미안하지만 오직 링 파인애플이어야 한다. 모든 재료가 식빵 중앙에 안착했으면 살포시 슬라이스 체다치즈를 덮는다. 원한다면 값비싼 치즈를 올려도 되지만 추천하고 싶지 않다. 하와이 토스트는 호화로운 재료보다는 저렴하면서도 익숙한 맛이 더 잘 어울린다. 자, 이제 준비한 토스트를 오븐에 넣고 데우면 된다. 치즈가 녹아서 링 파인애플의 실루엣이 드러나면 완성이다.

아랫입술에 닿는 토스트는 바삭하고 윗입술에 닿는 체다치즈는 살짝 끈적하면서 촉촉하다. 부드럽게 잘리는 파인애플은 뜨겁지 않을 정도로 따듯하고 통통한 햄을 씹는 맛이 경쾌하다. ‘반(反)하와이 피자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좋아하는 걸 보면 한 번쯤은 도전해볼 맛이겠다.

 

그럼 저자의 ‘비타민 듬뿍 토스트 하와이’ 레시피를 보시라. 재료는 토스트 식빵 1장, 통조림 링 파인애플 1개, 식빵 크기에 맞는 햄 1장, 그리고 슬라이스 체다치즈 1장이다.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01 토스트용 식빵을 하나 꺼내서 오븐 트레이 위에 올린다.
02 식빵 위에 햄을 올린다.
03 햄 크기에 맞춰서 링 파인애플을 올린다.
04 파인애플 위에 체다치즈를 올린다.
05 오븐에 넣고 180도로 약 2분 정도 데운다. 2분이 되지 않았더라도 체다치즈가 녹아서 파인애플의 형태가 드러나면 꺼낸다.
06 비타민보다 설탕이 많은 과일주스에 곁들여 먹는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게 될 일이 생기면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제목이 왜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인가 했더니… 책 후반에 그 이유가 공개된다.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육개장은 보통 장례식장에서 자주 나오는 메뉴라는 점.

 

이 에세이는 독일이 배경이라 독일의 문화와 음식, 독일어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긴 하지만 그게 주는 아니다(물론 식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흥미롭게 보시겠지만). 그보다는 룸메이트인 요나스와의 우정을 추억하고 기리는 게 거의 전부라고 봐도 좋다. 그러니 ‘독일/독일어/독일 문화는 잘 모르는데…’라며 어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와 요나스의 일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감동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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