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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패니 플래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by Jaime Chung 2019.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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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패니 플래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중년 여인 에벌린 카우치는 시어머니를 뵈러 남편을 따라 요양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한 노부인을 만나게 된다.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은(여기서 클레오는 그녀의 남편 이름이고 그녀의 본명은 버지니아다)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에벌린은 이 부인이 살짝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해 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어간다.

소설은 에벌린과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 부인이 해 주는 자신의 젊은 시절 동네의 화제인이었던 이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이미슨 이야기, 그리고 이 사이에 낀 '윔스 통신'(앨라배마 주 휘슬 스톱 주간 소식지)이 번갈아 한 챕터씩 나오며 진행된다.

 

패니 플래그(Fannie Flag)의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에벌린이라는 여인의 성장기이자 이지와 루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목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액자식 구성 중 액자의 '사진'에 해당하는 이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이미슨이 운영하는 '휘슬 스톱 카페'가 자랑하는 메뉴이다(소설의 원제도 <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이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나는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도 봤으니 소설과 영화의 평을 한 번에 같이 하기로 하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레즈비언 이야기이다. 명랑하고 쾌활하며 겁 없는 소녀 이지는 사이가 좋고 또 잘 따랐던 오빠 버디가 죽은 후로 그 슬픔을 결코 이겨내지 못하고 그저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동네에 루스 제이미슨이 등장하자 그녀에게 홀딱 반한다.

"있잖아요, 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만약 누가 루스를 해치려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죽여 버릴 거예요."

"오, 이지, 말만 들어도 끔찍해."

"아뇨, 그렇지 않아요.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랑 때문에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아요?"

"음, 나는 어떤 이유로도 살인은 안 된다고 생각해."

"좋아요. 그렇다면 내가 죽을래요. 그건 어때요?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안 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고 하는데요."

"그건 달라."

"다르지 않아요. 난 지금 당장이라도 주저 없이 죽을 수 있어요. 그럼 내가 웃는 얼굴로 죽은 유일한 시체가 되겠네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오늘만 해도 죽을 수 있었잖아요?"

루스는 이지의 손을 잡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런데 영화 버전의 감독과 제작자들은 이 이야기를 '레즈비언물'로 묘사하기를 원치 않아서, 원작의 레즈비언 로맨스를 그냥 우정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작자와 두 주연 배우(이지 역의 매리 스튜어트 매스터슨과 루스 역의 메리 루이스 파커)는 이 영화를 레즈비언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지와 루스는 그냥 '절친' 정도로 묘사되었고, 따라서 내가 위에 인용한 이지의 대사도 삭제되었다.

둘이 친해지는 계기도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온다. 이지가 버디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거의 '자연인'처럼 사니까 루스가 얘를 돌봐준다는 느낌으로 치대다가 친구가 된다는 식이다.

이건 분명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인데 이렇게 바꾸고 나니 맥이 없어졌다. 이런 무슨!

 

소설과 영화 둘 다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루스를 학대한 남편 프랭크 베넷(영화에서는 닉 서시 분)이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이에 경찰이 카페를 드나들며 범인을 찾아내려 하는데, 위의 저 대사가 앞에 나왔다면 독자/관객이 '혹시 이지가...?' 하고 상상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에벌린(캐시 베이츠 분. 이때는 캐시 베이츠도 젊고 썩 예뻤다!)이 매주 스레드굿 부인(제시카 탠디 분)을 찾아가 정말로 이지가 프랭크를 죽였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꽤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이지가 범인일 가능성도 웬만큼 보여 줘야 독자/관객이 흥미롭게 보지 않겠나.

그런데 저 로맨틱하면서도 살벌한 대사를 영화에서는 하지 않으니,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다. '주인공이니까 뭐, 실제로 죽였다고 치더라도 벌 안 받겠지' 따위의 안일한 태도로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영화에 긴장감도 불어넣고 또 루스를 향한 이지의 불타는 사랑을 보여 주기에 이 대사만 한 게 또 없는데!

영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원작 소설이 정말 훨씬 더 낫다. 애초에 이건 레즈비언 사랑 이야기라고!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포스터

 

소설과 영화 둘 다 에벌린이 스레드굿 부인에게 이지와 루스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변모해 가는 과정을 잘 묘사했다.

에벌린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켰다.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오르가슴을 연기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가졌다. 괴상하다거나 남성 혐오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바가지를 긁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러던 에벌린이 이지의 당당하고 거칠 것 없는 성격을 닮아 가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자신이 '토완다'라는 여성 슈퍼 히어로가 되어 악당과 싸워 이기는 몽상, '할리우드로 가서 주연 남자 배우들에게 완벽한 몸매를 가진 20대 여자애들 말고 당신과 같은 나이대 여자를 상대역으로 삼으라고 명령'하는 몽상,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임 도구와 음식 등을 보내는 몽상 등등을 하면서.

마침내 그녀는 떠받들며 모시던 남편에게도 당당하게 반항할 수 있게 된다.

영화가 소설보다는 그 점을 좀 더 코믹하게 잘 그렸다. 작품 끝맺음도 영화가 소설보다는 조금 더 밝은 느낌이다.

영화에서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이 바로 이지 본인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는데, 이건 영화 끝에 에벌린이 부인에게 "오늘 그녀(이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부인이 싱긋 웃는 장면이 나와서 그런 듯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스레드굿 부인은 본인 입으로 자기는 스레드굿 가문의 남자(클레오)와 결혼해 그 집안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소설에서는 스레드굿 부인이 자기는 버디를 내심 좋아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스레드굿 부인이 곧 이지였다면 자기 친오빠를 짝사랑한 셈이면 그러면 으윽, 징그럽다.

어쨌거나 영화만 보면 다소 헷갈릴 수 있으나 이지와 스레드굿 부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판결 땅땅.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민음사 영어 번역은 복불복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이건 꽤 괜찮았다.

소설 본문 뒤에는 (소설에 나오는) 음식 요리법까지 붙어 있다(내가 십시(요리를 잘하는 흑인 여인 이름)처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종이책은 총 536쪽으로 꽤 두껍고 길긴 한데, 재미있어서 독서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번 읽어 보시라! 영화를 보실 거면 원작을 먼저 읽는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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